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해당 문서에서는 중화민국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건국
신해혁명의 계기가 되는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전, 혁명 찬성론자들은 비밀 조직을 결성하며 힘을 길렀다. 대표적인 혁명론자인 쑨원은 1905년 일본에서 중국동맹회를 창설하였으며,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그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들의 비전은 “청 제국을 무너뜨리고 근대 공화국을 세운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해외의 화교들과 상인, 지식인, 학생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혁명의 불씨는 우창 봉기(1911)가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되었다. 당시 우창은 현대식 군사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현대화된 신군을 위한 현대적 무기들이 많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때 우창에 주둔하던 신군 사이에 쑨원의 혁명이념이 많이 퍼졌으며 병사들은 혁명 조직에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우창 봉기는 우창(Wuchang)에서 폭탄 사고가 일어나며 비밀 혁명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일어났는데, 군인들이 즉시 봉기하여 도시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혁명군은 민주공화정을 골자로 하는 군사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에 신해혁명이라 일컫는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혁명 봉기가 도미노처럼 확산되었으며, 불과 6주 만에 대부분의 중국 성(省)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청나라 정부가 이를 관망만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닌지라 서둘러 진압군을 파견하는 한편 군사적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에게 급히 도움의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북양군은 중국 최정예 군사조직으로서 청나라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상황은 이미 통제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당시 한커우를 점령한 진압군은 편제가 완전히 확충되지 않으면 양쯔강 이남으로 도하하는건 무리라고 대놓고 명령을 거부했으며 새롭게 편제된 진압군조차 혁명군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혁명군은 우후죽순 제멋대로 등장했고 서로 연계가 잘 안 되었으며 탄약과 필수물자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도인 북경과 거리가 먼 지역은 쉽사리 독립 선포를 달성했지만 가깝거나 요충지인 지역은 아직 남아있는 청군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청조를 무너트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양쯔강의 이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이 이 지역이 신해혁명으로 전장의 한복판에 놓이자 적극적으로 화의를 주선하기 시작했다. 이에 청 정부는 군권을 가진 원세개(Yuan Shikai) 에게 협상 역할을 맡겼으며,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퇴위시키는 대신 초대 대통령이 된다”는 거래를 하였다. 이를 혁명군이 수용하며 이것으로 혁명군의 남부와 북양군벌의 북부의 화해, 즉 남북의화(南北議和)가 성립되었다. 또한 1912년 마지막 황제 푸이(宣統帝)가 퇴위하며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비한족 지방의 독립과 오족공화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뒤, 중앙 권력이 약화되며 티베트, 몽골, 신장 같은 변방 지역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사실상 독립적 정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티베트는 13대 달라이 라마가 청이 붕괴한 틈을 타 독립을 선언하였고, 몽골은 보그드 칸이 독립한 제정 몽골을 선포하였다. 또한 신장 지역은 군벌과 지방 통치자들에 의해서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되었다. 특히 티베트는 시믈라 조약(The Simla Convention)을 1914년에 영국과 체결하여 티베트의 영토, 지위, 중국과의 관계 등을 규정하였다. 이때 중국은 조약 인정을 거부하였으나, 하지만 티베트는 1951년까지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누렸다.
이러한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에 따라 중화민국에는 오족공화(五族共和, Five Races Under One Union)라는 사상이 등장하였다. 이는 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 족이 하나의 깃발아래 통합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족 중심적 정책이 강화되고 한족에 대한 동화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티베트·몽골·신장 지역은 이에 대해 반발하였다.
중화제국의 선포와 군벌, 사회 운동
위안스카이는 상당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이 세워지자 임시 대총통인 쑨원을 몰아내고 자신이 대총통이 되었음에도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면서 홍헌제제를 선포하며 중화제국을 건국하였다. 관저인 중난하이의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개칭했다. 물론 무리수라 반발이 어마어마했고 이에 대항하여 1915년 12월 25일 호국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반대의견을 수용하여 1916년 3월 23일 왕정을 취소하고 중화제국은 겨우 3개월 만에 멸망한다.
3월 22일 왕정 취소를 발표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중화민국의 공화정 체제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남방의 군무원은 공화제 회복 정도로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고 위안스카이와 그 일족의 재산 몰수, 공민권 박탈, 국외추방을 요구했다. 위안스카이는 과도기 동안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총통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요독증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6일 급사한다.
갑작스러운 중앙 권력의 공백은 중국을 군벌 시대로 몰아넣었다. Figure 2는 당시 중국이 군벌에 의해 쪼개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붉은 지역은 분양군벌 중심의 여러 군벌들이며, 파란 지역은 국가를 다시 통일하고 근대적 공화국을 세우려는 정치세력인 국민당이다. 국민당은 쑨원에 의해 세워졌으며, 1920년대에 국민혁명군(NRA)을 조직하고 북벌을 통해 중국을 재통일하고자 하였다. 이때 각각의 군벌들은 독자적인 군대와 세금 체계를 갖추었으며, 열강(일본, 러시아, 영국 등)이 중국 정치에 깊게 개입하였다. 지식인과 학생들은 이런 혼란에 절망하며 새로운 정치 체제를 갈망했고, 공산주의·무정부주의·민족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확산되었다.
무정부주의자
정치와 국가 권력에 대한 환멸이 퍼지면서, 일부 청년·지식인은 무정부주의를 대안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무정부주의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윤리적 사회개혁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그들은 중국의 도덕·사회·가족·경제 체계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초급진적 지식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개혁은 실패했고, 국민당의 정치혁명은 너무 느리며, 군벌은 당연히 최악이므로 기존 정치가 모두 실패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정치와 국가가 문제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고 사유재산의 최소화와 노동의 평등화를 통한 협력을 통한 사회 유지를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이를 이루기 위해 파리와 도쿄에서 “근로-학습 운동”을 조직하여 그들의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였다.
비록 그들은 중국을 통치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중국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군벌·제국주의·유교 가부장제를 비판한 점은 중국 현대사에서 사상적 토대가 되었으며, 공산당 사상과 여성해방운동 등에도 영향을 크게 주었다.
여성운동
당시 중화민국에서 여성운동은 국가의 해방과 여성의 해방을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그들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여학교의 설립과 전족 철폐운동, 가부장제적 가족제도 비판, 여성 잡지 발간, 여성 공동체 조직 등을 하였다. Figure 은 추근秋瑾)이라는 여성 혁명가로, 여성 교육·반족발(발 묶기 금지)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된다.
5·4운동
1917년 중화민국은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은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14만 명의 노동자(“Chinese Labour Corps”)를 프랑스 전선에 보내었다. 그들은 참호 공사, 군수 물자 운반, 시신 운반 등 위험한 노동을 담당했다. 이는 아래의 사항들을 노린 것이었다:
-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국제적 인정 회복
- 중국 영토(특히 산둥성)에서 일본의 세력 축소
- “열강 체제” 안에서 중국의 지위 개선
하지만 1919년 베르사유조약에서 산둥을 독일이 아닌 ‘일본’에게 넘기는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중국의 지식인·학생들은 “열강은 중국을 절대 대등한 주권국가로 보지 않는다”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이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되는 결정이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전쟁 후 세계 재편 과정에서 각 민족은 스스로 국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중국·티베트·몽골·베트남·한국 등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베르사유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동맹국들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고, 그 결과 중국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은 허울뿐이고, 서구는 여전히 아시아를 식민지 취급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반서구·반제국주의 감정을 촉발시켰으며, 중국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서구 대신 새로운 이념(마르크스주의·아나키즘·민족주의)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5·4운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학생, 상인, 노동자들은 베르사유에서 산둥을 일본에게 넘긴 결정에 분노하였고,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들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는 학생과 상인, 노동자가 함께 참여한 최초의 대중 정치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상품 불매, 총파업,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기존 왕조적 충성 대신 국가·민족에 대한 근대적 애국심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화운동
5·4운동의 맥락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운동 중 하나가 신문화 운동이다. 신문화운동은 당시 중국 사회는 여전히 충효, 가부장제, 군신 관계 등의 유교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유교 사상이 중국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지식인들은 기존 유교적 질서, 과학과 민주주의 부족, 권위주의적 가족 제도 등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과학, 민주주의, 개인의 해방, 자유로운 사상과 비판적 지성을 강조하며 중국 사회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또한 5·4운동과 결합해 중국 혁명의 지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 이후 지식인들은 서구 자유주의는 아시아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대안적인 이념을 탐색하였고, 이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1919–1921년에 북경·상해 등에서 마르크스 연구회가 조직되고 192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 공산당(중공)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