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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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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대두==
==중국 공산당의 대두==
[[파일:Figure 4. 러시아 혁명.png|섬네일|Figure 4. 러시아 혁명]]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전제군주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 해방, 사회주의의 도래를 슬로건으로 삼으며 민중의 집단적 힘과 연대를 그들의 힘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 질서에 균열을 냈는데, “약한 나라가 자력으로 혁명에 성공했다”는 사례를 중국과 같은 여러 약소국들에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전제군주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 해방, 사회주의의 도래를 슬로건으로 삼으며 민중의 집단적 힘과 연대를 그들의 힘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 질서에 균열을 냈는데, “약한 나라가 자력으로 혁명에 성공했다”는 사례를 중국과 같은 여러 약소국들에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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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의 북벌==
==국민당의 북벌==
[[파일:Figure 5. 장제스.png|섬네일|283x283픽셀|Figure 5. 장제스]]
국민당을 세운 쑨원은 중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했으며 1차 국공합작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을 주장하며 중국을 통일시키고자 했으나 세력의 빈약함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채 1925년 사망했다. 그후 국민당을 장악한 사람은 장제스(蔣介石, Chiang Kai-shek)이며 그는 쑨원 사후 권력 공백 상태에 빠진 국민당을 군벌적 성격이 강한 장제스 체제로 재편하였다. 그는 국민당 군대(국민혁명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를 “총사령(Generalissimo)”이라 불렀다. 특히 그는 강한 반공주의적 성향을 지녔는데, 이는 후일 공산당과의 갈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민당을 세운 쑨원은 중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했으며 1차 국공합작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을 주장하며 중국을 통일시키고자 했으나 세력의 빈약함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채 1925년 사망했다. 그후 국민당을 장악한 사람은 장제스(蔣介石, Chiang Kai-shek)이며 그는 쑨원 사후 권력 공백 상태에 빠진 국민당을 군벌적 성격이 강한 장제스 체제로 재편하였다. 그는 국민당 군대(국민혁명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를 “총사령(Generalissimo)”이라 불렀다. 특히 그는 강한 반공주의적 성향을 지녔는데, 이는 후일 공산당과의 갈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중국은 각지 군벌이 서로 싸우는 군벌 혼란기였다. 장제스는 분열된 중국을 군사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1926년에 북벌을 시작하였다. Figure는 국민당의 진격 경로를 보여주며, 북벌의 주요 목표가 우한, 난창,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최종 목표는 베이징이었다. 북벌은 장제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만들어 주었으며, 국민당이 ‘중앙 정부’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는 공산당과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1920년대 중국은 각지 군벌이 서로 싸우는 군벌 혼란기였다. 장제스는 분열된 중국을 군사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1926년에 북벌을 시작하였다. 북벌의 주요 목표는 우한, 난창,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였으며, 최종 목표는 베이징이었다. 북벌은 장제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만들어 주었으며, 국민당이 ‘중앙 정부’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는 공산당과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국민당의 북벌은 1928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중국 대부분을 지배하던 북양군벌들의 세력들을 크게 위축시켰다. 반면 중국국민당은 기존의 광동성에 국한되어 있던 세력권이 복건, 호북, 호남, 절강, 강소, 하남, 산동에 이르게 되면서 2억에 달하는 인구가 국민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비록 4.12 상하이 쿠데타와 국공결렬로 공산당과의 합작이 종결되고 공산당이 친공 부대를 포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국민정부의 아성을 흔들 수준은 아니었으며 펑위샹, 옌시산을 비롯한 강대한 군벌들이 국민당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국민정부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국민당의 북벌은 1928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중국 대부분을 지배하던 북양군벌들의 세력들을 크게 위축시켰다. 반면 중국국민당은 기존의 광동성에 국한되어 있던 세력권이 복건, 호북, 호남, 절강, 강소, 하남, 산동에 이르게 되면서 2억에 달하는 인구가 국민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비록 4.12 상하이 쿠데타와 국공결렬로 공산당과의 합작이 종결되고 공산당이 친공 부대를 포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국민정부의 아성을 흔들 수준은 아니었으며 펑위샹, 옌시산을 비롯한 강대한 군벌들이 국민당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국민정부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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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학살===
===상하이 대학살===
북벌 과정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일시적 협력 관계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세력은 무섭게 불어나고 있었고, 장제스는 산당이 노동자 조직·혁명 운동을 강화하는 것을 보며 공산당을 국민당의 적대 세력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 진입한 뒤 노동자 파업조직, 공산당 지부, 좌익 단체를 전격적으로 공격하였다.  
[[파일:Figure 5. 상하이 대학살.png|섬네일|200x200픽셀|Figure 5. 상하이 대학살]]
북벌 과정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일시적 협력 관계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세력은 무섭게 불어나고 있었고, 장제스는 공산당이 노동자 조직·혁명 운동을 강화하는 것을 보며 공산당을 국민당의 적대 세력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 진입한 뒤 노동자 파업조직, 공산당 지부, 좌익 단체를 전격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노동자가 체포, 고문, 처형되었다. 또한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국공내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국민당에 의해서 도시에서 쫓겨나 농촌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마오쩌둥의 “농민 기반 혁명노선”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수천~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노동자가 체포, 고문, 처형되었다. 또한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국공내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국민당에 의해서 도시에서 쫓겨나 농촌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마오쩌둥의 “농민 기반 혁명노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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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활 운동===
===신생활 운동===
[[파일:Figure 6. 신생활 운동.png|섬네일|Figure 6. 신생활 운동]]
장제스는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로 약화된 이래 군벌의 난립과 공산주의의 침투로 사회 전반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난징 국민정부는 만주를 빼앗아간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와 민중들의 무지를 척결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장제스는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로 약화된 이래 군벌의 난립과 공산주의의 침투로 사회 전반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난징 국민정부는 만주를 빼앗아간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와 민중들의 무지를 척결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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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의 몰락==
==국민당의 몰락==
1931년 만주 침략(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아시아 전역으로 급속히 팽창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공산당보다 일본이 더 큰 위협이라고 보았고, 국민당은 공산당과 다시 국공합작을 이루어 1937년 중일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국민당의 주력군은 일본군과 싸우며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반면, 공산당은 상대적으로 병력을 보존하며 성장하였다. 이는 공산당이 농촌에서 세력을 키우고 인민 지지를 확대할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1931년 만주 침략(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아시아 전역으로 급속히 팽창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공산당보다 일본이 더 큰 위협이라고 보았고, 국민당은 공산당과 다시 국공합작을 이루어 1937년 중일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국민당의 주력군은 일본군과 싸우며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반면, 공산당은 상대적으로 병력을 보존하며 성장하였다. 이는 공산당이 농촌에서 세력을 키우고 인민 지지를 확대할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파일:Figure 7. 국민당의 대만 도피.png|섬네일|200x200픽셀|Figure 7. 국민당의 대만 도피]]
1937~45년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통해 서로 협력하였지만, 일본이 항복하자, 두 정당은 “중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시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당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일본이 점령하였던 만주 지역을 먼저 점령하기 위한 두 당 사이의 경쟁이 이루어졌고, 이는 1946년 국공내전의 재개로 이어졌다. 국민당은 부패, 일본과의 전쟁의 부담, 경제난, 민심 이반, 공산당의 농민 동원 전략들은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열세에 있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1949년,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결국 중국 대륙은 공산당이 장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37~45년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통해 서로 협력하였지만, 일본이 항복하자, 두 정당은 “중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시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당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일본이 점령하였던 만주 지역을 먼저 점령하기 위한 두 당 사이의 경쟁이 이루어졌고, 이는 1946년 국공내전의 재개로 이어졌다. 국민당은 부패, 일본과의 전쟁의 부담, 경제난, 민심 이반, 공산당의 농민 동원 전략들은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열세에 있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1949년,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결국 중국 대륙은 공산당이 장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각주==
==각주==

2025년 11월 21일 (금) 02:39 기준 최신판

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해당 문서에서는 중화민국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건국

파일:Figure 10. 쑨원.png
Figure 1. 쑨원

신해혁명의 계기가 되는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전, 혁명 찬성론자들은 비밀 조직을 결성하며 힘을 길렀다. 대표적인 혁명론자인 쑨원은 1905년 일본에서 중국동맹회를 창설하였으며,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그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들의 비전은 “청 제국을 무너뜨리고 근대 공화국을 세운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해외의 화교들과 상인, 지식인, 학생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혁명의 불씨는 우창 봉기(1911)가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되었다. 당시 우창은 현대식 군사산업이 발달한 도시로 현대화된 신군을 위한 현대적 무기들이 많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때 우창에 주둔하던 신군 사이에 쑨원의 혁명이념이 많이 퍼졌으며 병사들은 혁명 조직에 많이 가담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우창 봉기는 우창(Wuchang)에서 폭탄 사고가 일어나며 비밀 혁명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일어났는데, 군인들이 즉시 봉기하여 도시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혁명군은 민주공화정을 골자로 하는 군사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이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에 신해혁명이라 일컫는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혁명 봉기가 도미노처럼 확산되었으며, 불과 6주 만에 대부분의 중국 성(省)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청나라 정부가 이를 관망만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닌지라 서둘러 진압군을 파견하는 한편 군사적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에게 급히 도움의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북양군은 중국 최정예 군사조직으로서 청나라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상황은 이미 통제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당시 한커우를 점령한 진압군은 편제가 완전히 확충되지 않으면 양쯔강 이남으로 도하하는건 무리라고 대놓고 명령을 거부했으며 새롭게 편제된 진압군조차 혁명군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혁명군은 우후죽순 제멋대로 등장했고 서로 연계가 잘 안 되었으며 탄약과 필수물자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도인 북경과 거리가 먼 지역은 쉽사리 독립 선포를 달성했지만 가깝거나 요충지인 지역은 아직 남아있는 청군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청조를 무너트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양쯔강의 이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이 이 지역이 신해혁명으로 전장의 한복판에 놓이자 적극적으로 화의를 주선하기 시작했다. 이에 청 정부는 군권을 가진 원세개(Yuan Shikai) 에게 협상 역할을 맡겼으며,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퇴위시키는 대신 초대 대통령이 된다”는 거래를 하였다. 이를 혁명군이 수용하며 이것으로 혁명군의 남부와 북양군벌의 북부의 화해, 즉 남북의화(南北議和)가 성립되었다. 또한 1912년 마지막 황제 푸이(宣統帝)가 퇴위하며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비한족 지방의 독립과 오족공화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뒤, 중앙 권력이 약화되며 티베트, 몽골, 신장 같은 변방 지역은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사실상 독립적 정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티베트는 13대 달라이 라마가 청이 붕괴한 틈을 타 독립을 선언하였고, 몽골은 보그드 칸이 독립한 제정 몽골을 선포하였다. 또한 신장 지역은 군벌과 지방 통치자들에 의해서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되었다. 특히 티베트는 시믈라 조약(The Simla Convention)을 1914년에 영국과 체결하여 티베트의 영토, 지위, 중국과의 관계 등을 규정하였다. 이때 중국은 조약 인정을 거부하였으나, 하지만 티베트는 1951년까지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누렸다.

이러한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에 따라 중화민국에는 오족공화(五族共和, Five Races Under One Union)라는 사상이 등장하였다. 이는 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티베트 족이 하나의 깃발아래 통합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족 중심적 정책이 강화되고 한족에 대한 동화 압력이 증가함에 따라 티베트·몽골·신장 지역은 이에 대해 반발하였다.

중화제국의 선포와 군벌, 사회 운동

파일:Figure 2. 군벌에 의해 쪼개진 중국.png
Figure 2. 군벌에 의해 쪼개진 중국

위안스카이는 상당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이 세워지자 임시 대총통인 쑨원을 몰아내고 자신이 대총통이 되었음에도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면서 홍헌제제를 선포하며 중화제국을 건국하였다. 관저인 중난하이의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개칭했다. 물론 무리수라 반발이 어마어마했고 이에 대항하여 1915년 12월 25일 호국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반대의견을 수용하여 1916년 3월 23일 왕정을 취소하고 중화제국은 겨우 3개월 만에 멸망한다.

3월 22일 왕정 취소를 발표한 위안스카이는 3월 23일 중화민국의 공화정 체제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남방의 군무원은 공화제 회복 정도로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고 위안스카이와 그 일족의 재산 몰수, 공민권 박탈, 국외추방을 요구했다. 위안스카이는 과도기 동안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총통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요독증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6일 급사한다.

갑작스러운 중앙 권력의 공백은 중국을 군벌 시대로 몰아넣었다. Figure 2는 당시 중국이 군벌에 의해 쪼개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붉은 지역은 분양군벌 중심의 여러 군벌들이며, 파란 지역은 국가를 다시 통일하고 근대적 공화국을 세우려는 정치세력인 국민당이다. 국민당은 쑨원에 의해 세워졌으며, 1920년대에 국민혁명군(NRA)을 조직하고 북벌을 통해 중국을 재통일하고자 하였다. 이때 각각의 군벌들은 독자적인 군대와 세금 체계를 갖추었으며, 열강(일본, 러시아, 영국 등)이 중국 정치에 깊게 개입하였다. 지식인과 학생들은 이런 혼란에 절망하며 새로운 정치 체제를 갈망했고, 공산주의·무정부주의·민족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확산되었다.

무정부주의자

정치와 국가 권력에 대한 환멸이 퍼지면서, 일부 청년·지식인은 무정부주의를 대안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무정부주의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윤리적 사회개혁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그들은 중국의 도덕·사회·가족·경제 체계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초급진적 지식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개혁은 실패했고, 국민당의 정치혁명은 너무 느리며, 군벌은 당연히 최악이므로 기존 정치가 모두 실패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정치와 국가가 문제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고 사유재산의 최소화와 노동의 평등화를 통한 협력을 통한 사회 유지를 목표로 하였다. 그들은 이를 이루기 위해 파리와 도쿄에서 “근로-학습 운동”을 조직하여 그들의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였다.

비록 그들은 중국을 통치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중국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군벌·제국주의·유교 가부장제를 비판한 점은 중국 현대사에서 사상적 토대가 되었으며, 공산당 사상과 여성해방운동 등에도 영향을 크게 주었다.

여성운동

파일:Figure 3. 추근.png
Figure 3.  추근

당시 중화민국에서 여성운동은 국가의 해방과 여성의 해방을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그들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여학교의 설립과 전족 철폐운동, 가부장제적 가족제도 비판, 여성 잡지 발간, 여성 공동체 조직 등을 하였다. Figure 은 추근秋瑾)이라는 여성 혁명가로, 여성 교육·반족발(발 묶기 금지)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된다.

5·4운동

1917년 중화민국은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은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14만 명의 노동자(“Chinese Labour Corps”)를 프랑스 전선에 보내었다. 그들은 참호 공사, 군수 물자 운반, 시신 운반 등 위험한 노동을 담당했다. 이는 아래의 사항들을 노린 것이었다:

  1.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국제적 인정 회복
  2. 중국 영토(특히 산둥성)에서 일본의 세력 축소
  3. “열강 체제” 안에서 중국의 지위 개선

하지만 1919년 베르사유조약에서 산둥을 독일이 아닌 ‘일본’에게 넘기는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중국의 지식인·학생들은 “열강은 중국을 절대 대등한 주권국가로 보지 않는다”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이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되는 결정이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전쟁 후 세계 재편 과정에서 각 민족은 스스로 국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중국·티베트·몽골·베트남·한국 등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베르사유 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동맹국들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고, 그 결과 중국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은 허울뿐이고, 서구는 여전히 아시아를 식민지 취급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반서구·반제국주의 감정을 촉발시켰으며, 중국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서구 대신 새로운 이념(마르크스주의·아나키즘·민족주의)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5·4운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학생, 상인, 노동자들은 베르사유에서 산둥을 일본에게 넘긴 결정에 분노하였고, 1919년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들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는 학생과 상인, 노동자가 함께 참여한 최초의 대중 정치 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상품 불매, 총파업,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기존 왕조적 충성 대신 국가·민족에 대한 근대적 애국심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화운동

5·4운동의 맥락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운동 중 하나가 신문화 운동이다. 신문화운동은 당시 중국 사회는 여전히 충효, 가부장제, 군신 관계 등의 유교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유교 사상이 중국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지식인들은 기존 유교적 질서, 과학과 민주주의 부족, 권위주의적 가족 제도 등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과학, 민주주의, 개인의 해방, 자유로운 사상과 비판적 지성을 강조하며 중국 사회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또한 5·4운동과 결합해 중국 혁명의 지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 이후 지식인들은 서구 자유주의는 아시아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대안적인 이념을 탐색하였고, 이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1919–1921년에 북경·상해 등에서 마르크스 연구회가 조직되고 192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 공산당(중공)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다.

중국 근대문학의 창시자로도 불리는 루쉰(魯迅, Lu Xun)은 신문화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루쉰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 전통 유교 질서를 “사람을 먹는 제도”라 비판하였고, 「아Q정전」에서는 중국 민중의 수동적/굴종적 정신을 풍자하여 중국 사회를 내부에서 개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또한 군벌 시대, 전통적 가부장제, 유교 가치, 미신 등 전근대적 요소를 통렬히 비판 하며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대 정신의 변화는 신여성(New Woman)이라고 일컬어지는 개념을 만들었다. 신여성은 단발머리, 치파오(旗袍), 하이힐과 같이 구별되는 옷차림을 하고 공공장소(카페·무도회장·백화점 등)를 자유롭게 출입하고, 독자적 소비 활동과 남녀 혼성 교류를 하는 등 이전 전통 사회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여성상을 의미한다. 이는 서구식 미(美)의 기준이 확산되고, 전통적 ‘부덕(婦德)’ 대신 모던함·개성·자기표현이 강조됨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 도시 소비문화와 자본주의 가치의 유입을 보여준다.

신여성이라는 개념은 여성 주체성의 확대를 보여주지만 해당 개념이 결국 기업·남성 시각 중심의 “상품화된 여성성”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1935년 채추생(蔡楚生) 감독, 여배우 류안링위(阮玲玉) 주연의 신여성(新女性)이라는 이름의 영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해당 영화는 여성이 직면한 억압(가부장제, 빈곤, 사회적 낙인)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신여성의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다루었다. 또한 해당 영화는 새장(birdcage)이라는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이는 여성은 근대화된 중국에서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류안링위 배우가 실제로 신여성적 이미지와 언론의 억압 사이에서 고통을 받았다는 점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더욱 의미를 가진다.

중국 공산당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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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러시아 혁명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전제군주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 해방, 사회주의의 도래를 슬로건으로 삼으며 민중의 집단적 힘과 연대를 그들의 힘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 질서에 균열을 냈는데, “약한 나라가 자력으로 혁명에 성공했다”는 사례를 중국과 같은 여러 약소국들에게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은 1919년에 코민테른(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을 신설하였는데, 이는 전 세계 공산주의 정당을 지도·지원하기 위한 국제 조직이었다. 이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제도화하며, 공산주의가 이론에서 머물지 않고 실제로 각국에 공산당을 만들도록 적극 개입한 것이다. 이는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창립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실제로 보이친스키(Voitinsky)라는 코민테른 요원은 1920년 상하이에 도착하여 리다자오·천두슈 등 중국 혁명가들을 만나 공산당 조직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그는 초기 중국 공산당과 소련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코민테른 대표였으며, 중국 공산당 창당 회의(1921) 준비에 실질적 도움을 주었다.

중국 공산당의 대두는 신문화 운동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천두슈(陳獨秀, 1879–1942)는 신문화운동의 핵심 인물로, 《신청년》 잡지의 창립자이다. 그는 초기 공산당의 제1대 총서기로서 중국 사회개혁의 핵심은 “전통의 해체와 새로운 정치 이념의 도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 또한 북경대 도서관 사서로서 학생 운동·사상 교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 최초로 러시아 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적극 소개한 인물이었으며, “약소 민족 해방의 길은 사회주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국민당과의 비교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문제의 근원은 자본주의라고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는 고도화된 착취 구조로서, 중국의 빈곤·불평등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중국 내부의 봉건적인 지주 제도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여 그 폐단이 더욱 심각해 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 지주 몰수, 생산수단 국유화를 통해 경제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국민당은 이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국의 문제의 근원은 빈곤 그 자체와 글로벌 자본주의 경쟁에서 뒤처진 것이 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해야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화·자본 축적, 기업가·지주 계층과의 협력, 국가 주도 근대화를 통해 현대적인 자본주의를 육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민당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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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5. 장제스

국민당을 세운 쑨원은 중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했으며 1차 국공합작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을 주장하며 중국을 통일시키고자 했으나 세력의 빈약함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채 1925년 사망했다. 그후 국민당을 장악한 사람은 장제스(蔣介石, Chiang Kai-shek)이며 그는 쑨원 사후 권력 공백 상태에 빠진 국민당을 군벌적 성격이 강한 장제스 체제로 재편하였다. 그는 국민당 군대(국민혁명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를 “총사령(Generalissimo)”이라 불렀다. 특히 그는 강한 반공주의적 성향을 지녔는데, 이는 후일 공산당과의 갈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중국은 각지 군벌이 서로 싸우는 군벌 혼란기였다. 장제스는 분열된 중국을 군사력으로 통일하기 위해 1926년에 북벌을 시작하였다. 북벌의 주요 목표는 우한, 난창,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였으며, 최종 목표는 베이징이었다. 북벌은 장제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만들어 주었으며, 국민당이 ‘중앙 정부’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는 공산당과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국민당의 북벌은 1928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중국 대부분을 지배하던 북양군벌들의 세력들을 크게 위축시켰다. 반면 중국국민당은 기존의 광동성에 국한되어 있던 세력권이 복건, 호북, 호남, 절강, 강소, 하남, 산동에 이르게 되면서 2억에 달하는 인구가 국민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비록 4.12 상하이 쿠데타와 국공결렬로 공산당과의 합작이 종결되고 공산당이 친공 부대를 포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국민정부의 아성을 흔들 수준은 아니었으며 펑위샹, 옌시산을 비롯한 강대한 군벌들이 국민당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국민정부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한편 장제스는 공산당 숙청(4·12 쿠데타) 이후 소련·공산당·국민당 좌파 모두에게 강한 공격을 받으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잃고, 북벌을 계속 지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따라서 그는 일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고 일본(가고시마)으로 떠나 ‘정치적 소방(冷却期)’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태를 관망하며 복직과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준비하였다.

상하이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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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5. 상하이 대학살

북벌 과정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일시적 협력 관계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세력은 무섭게 불어나고 있었고, 장제스는 공산당이 노동자 조직·혁명 운동을 강화하는 것을 보며 공산당을 국민당의 적대 세력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 진입한 뒤 노동자 파업조직, 공산당 지부, 좌익 단체를 전격적으로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노동자가 체포, 고문, 처형되었다. 또한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국공내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가졌던 국민당에 의해서 도시에서 쫓겨나 농촌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마오쩌둥의 “농민 기반 혁명노선”으로 이어졌다.

난징 국민정부

1차 북벌도중 하야하였던 장제스는 단 몇 달 만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하야 이후 정치 지형이 급격하게 장제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국민당 좌파가 이끌었던 국민당 우한정부는 소련/공산당과 협력하여 장제스를 대체하고자 하였으나, 공산당에 의한 우한 농민운동·무장봉기 확산으로 인하여 우한정부가 공산당과 단절하였다. 또한 장제스가 떠난 뒤, 북벌을 지휘하던 우한정부는 군사력이 매우 약했고 통합된 지휘권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통합해서 지휘할 “중앙 군사 리더”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난징정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장제스는 국민당에 정식으로 복귀하고 국민당의 모든 실권을 다시 잡았다. 그는 난징에 수도를 세우고 국민정부(國民政府)를 수립하여 중국을 통치하였다.

장제스는 이후 1928년에 제 2차 북벌은 추진하여 장쭤린의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국민당 내에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힌 그는 초공작전을 개시하여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 공산당을 궤멸시켰다. 비록 공산당은 대장정을 단행해 가까스로 전멸을 면했지만 남은 군사력은 얼마 되지 않아 곧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될 게 뻔해 보였다. 이로서 자신에게 대항할 적들을 모조리 굴복시키는 데 성공한 장제스는 관심을 내치로 돌렸다. 장제스는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로 약화된 이래 군벌의 난립과 공산주의의 침투로 사회 전반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난징 국민정부는 만주를 빼앗아간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와 민중들의 무지를 척결하기 위한 개혁들을 시도하였다.

파시즘적 정부

난징 국민정부는 BIS를 세웠으며, 이는 사회 통제·첩보·반공 숙청을 위해 만든 비밀 경찰·첩보기관이었다. BIS는 나치 독일의 히믈러(SS 지휘자)에 비유될 정도로 공포 정치를 수행하였으며, 공산당원, 지식인, 반체제 인사 들을 추적·납치·처형하였다. 이는 KMT 정권의 독재적 성향을 보여주는 핵심 장치이다.

또한 장제스는 1932년에 비밀 연설을 통해서 장제스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강조한 중국식 파시즘적 국가주의 철학을 강조했다. 당시 중국은 일본의 실질적인 위협하에 있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북동부를 점령하여 괴뢰국을 세웠다. 이는 중국의 핵심 산업·자원이 집중된 지역이었으며, 중국 정부의 무력함이 국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비밀 연설에서 “영토를 잃었어도, 민족정신(national spirit)만 살아있으면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서양/일본 파시즘 국가처럼 강력한 단일정당 체제(일당 독재)를 요구하였다. 또한 충, 효 등의 전통적 유교적 가치를 부활시키며 국민을 정신적·도덕적으로 규율하여 강인한 민족을 만들고자 하였다.

신생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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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6. 신생활 운동

장제스는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로 약화된 이래 군벌의 난립과 공산주의의 침투로 사회 전반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난징 국민정부는 만주를 빼앗아간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와 민중들의 무지를 척결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신생활 운동은 1934년 부터 장제스·쑹메이링 부부가 주도한 국민정신 재건 운동이다. 신생활 운동은 서구식 자유주의/공산주의를 이단시하고 국민을 “군대처럼” 규율하려는 시도의 연장이었다. 이에 따라 옷, 위생, 질서, 근면과 같은 행동 규범을 세세하게 규제하였다. 이는 유교, 파시즘, 감시체제의 혼합으로서 국민당 정권이 사회 전체를 완전히 통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중국인들의 의식 전반을 개혁하고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국민당의 몰락

1931년 만주 침략(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아시아 전역으로 급속히 팽창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은 동남아시아·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공산당보다 일본이 더 큰 위협이라고 보았고, 국민당은 공산당과 다시 국공합작을 이루어 1937년 중일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국민당의 주력군은 일본군과 싸우며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반면, 공산당은 상대적으로 병력을 보존하며 성장하였다. 이는 공산당이 농촌에서 세력을 키우고 인민 지지를 확대할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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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7. 국민당의 대만 도피

1937~45년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통해 서로 협력하였지만, 일본이 항복하자, 두 정당은 “중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시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당을 화해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일본이 점령하였던 만주 지역을 먼저 점령하기 위한 두 당 사이의 경쟁이 이루어졌고, 이는 1946년 국공내전의 재개로 이어졌다. 국민당은 부패, 일본과의 전쟁의 부담, 경제난, 민심 이반, 공산당의 농민 동원 전략들은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열세에 있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1949년,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결국 중국 대륙은 공산당이 장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