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역사
상위 문서: 청나라
개요
해당 문서에서는 청나라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후금의 건국

여진족은 본래 통일된 민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명의 통제력 약화와 무역 제재로 여진 사회 내부에 경제·군사적 긴장이 축적되었고, 이 상황을 틈타 누르하치(ᠨᡠᡵᡤᠠᠴᡳ, Nurhaci)는 만주의 여진족들 사이의 혼인, 외교, 전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통합에 성공하여 후금(後金, Late Jin)을 건국하였다. 이때, ‘여진 부족 통합’은 단순한 부족 연맹에서 그치지 않고 군사·행정 조직인 팔기제(八旗制, Eight Banners)의 창설로 이어졌다. 또한 누르하치는 몽골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고, 조선과도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사르후 전투(Battle of Sarhū, 1619)는 만주 지역 여진족의 독립과 통일을 확정지은 전투이다. 사르후 전투는 조선, 명나라, 예허 여진족 연합과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해당 전투는 후금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후금은 예허 여진족 까지 정복하여 여진족의 통합이 완성되게 된다. 또한 명나라는 이 시점부터 방어적으로 태세를 전환하였으며, 조선은 명의 요청으로 참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이후 후금과의 관계 재정립을 한다. 이 승리 이후 누르하치는 자신을 ‘천명(天命)을 받은 자’로 인식하며 제국 건설을 추진했다.
청나라의 건국과 확장
홍타이지(ᡥᠣᠩ ᡨᠠᡳᠵᡳ, Hong Taiji)는 누르하치의 아들로, 후금의 제2대 황제이다. 홍타이지는 1636년 ‘청(淸, Qing)’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여 청 왕조의 실질적 창시자로 불린다. 또한 그는 1635년에는 몽골을 정복하였으며, 조선을 두차례 침공하여 1636년 조선을 청의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이를 계기로 왕자들과 귀족 자제들을 심양(Shenyang)에 인질로 보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비를 설치하였다. 또한 조선은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의 대명 전쟁에 합류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외교 관계 변화가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의 근본적 재편, 즉 명 중심의 화이(華夷, Hua–Yi) 질서가 무너지고, 만주 중심의 새로운 질서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홍타이지는 몽골정복을 불교적 정당성(티베트 불교와의 연계)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청 왕조는 불교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신성한 제국’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는 Figure 에서 보이는 청 황후의 초상에서 염주에서 따온 구슬 장신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진(Jurchen)”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만주(Manchu)”로 대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문수보살(Manjushri, 지혜의 상징)와 만주를 연결하여, 황제가 그 화신이라는 불교적 상징정치를 활용했다.
중원 통일과 남하
당시 명나라는 흉년과 기근, 전염병, 자연재해, 은 유통의 불안정 등으로 인한 재정 위기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또한 만력제의 태업과, 임진왜란에 대한 무리한 항왜 지원 등으로 인해 국력이 빠르게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내부적으로는 농민 반란으로 인해, 외부적으로는 누르하치에 의한 만주 통합으로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특히 명나라의 숨통을 거의 끊은 사건으로는 이자성(李自成, Li Zicheng)의 난이 있다. 이자성은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로, 스스로를 “창왕(闖王, Dashing King)”이라 칭하였는데 1644년 북경(자금성)을 점령하며 명 왕조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못하고 잠시 권력의 공백을 메웠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청에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을 제공하여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으로 진입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이자성의 반란은 명의 몰락을 앞당기고, 청의 중국 본토 진입 통로를 열어준 셈이다.
명나라의 멸망 후, 남중국에는 Fuzhou, Guangzhou, Anlong 등의 남명 정권들이 들어선다. 여러 명의 황족이 지역별로 “복명(復明)”을 시도했으나 서로 통합하지 못하였고, 결국 청나라에게 차근차근 격파되며 실패하게 된다.
청나라는 명 잔존세력을 제압한 후, 남부 통치 강화를 위해 세 명의 한족 장군에게 봉왕(藩王) 작위를 부여하였으며, 이를 삼번정책(三藩制度, The Three Feudatories)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오삼계(吳三桂, Wu Sangui)로 그는 본래 산해관(Shanhaiguan,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을 수비하던 명나라 장군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숭정제가 사망하자, 청군과 손잡고 북경의 이자성 반군을 공격하여 청군의 중국 진입을 허용하였다. 이후 청으로부터 번왕(藩王)의 작위를 받고 남부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청나라는 상가희(광동 지방)와 경중명(복건 지방)에게 번왕의 칭호와, 사실상의 자치권을 주었다. 이는 초기 청 왕조의 중국 대륙에 대한 통치가 아직 중앙집권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이 점점 군벌로서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강희제(康熙帝)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의 봉지를 회수하려고 했지만, 세 번왕이 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해당 반란은 진압되었고, 청나라는 이를 통해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과, 중국 전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게 된다.

Figure 2는 1645–1683년 사이 청이 남중국 지역을 점령해 나가는 경로를 보여준다. 청은 1644년 북경 점령 이후 점차 남하하며, 저지방(江南)과 남부 광동·복건·운남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청 제국의 확장은 단순한 군사 정복이 아니라, ‘명 잔존 세력(Southern Ming)’을 제압하고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즉, 청의 남하란 ‘중국화(Sinicization)’의 시작이자, 북방 제국이 중국문명권 중심으로 진입하는 사건이다.
명나라의 마지막 잔존 세력은 동녕국(東寧國, Kingdom of Tungning)으로, 1662년에 대만에서 건국되었다. 동녕국은 명의 충신인 정성공(鄭成功, Zheng Chenggong)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로, 네덜란드 식민 세력을 몰아내고 세워졌다. 동녕국의 명목적인 왕은 녕경왕(Prince of Ningjing)이었으며, 실권은 정성공에게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1683년, 청의 해군 장군 시랑(施琅, Shi Lang)에게 정벌당해 멸망되었다. 이는 타이완이 중국 영토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준가르 지역 정벌
준가르(Dzungar)족은 몽골계 오이라트(Oirat) 부족의 후예로, 청 제국 북서쪽 경계 지역(지금의 신장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세력이다. 청나라 초기에는 이들과 외교적 협력과 긴장이 반복되었지만, 점차 청의 영토 확장과 종교(티베트 불교) 영향력 경쟁이 심화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로 인해서 청나라는 1687년부터 1757년까지, 강희제(Kangxi Emperor), 옹정제(Yongzheng Emperor), 건륭제(Qianlong Emperor) 세 황제가 차례로 준가르 세력을 공격하였다.
특히 건륭제 시기에 청군은 대규모 원정을 통해 준가르를 완전히 멸망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청은 준가르 인구의 대다수를 살해하거나 이주시켜 준가르 멸족(準噶爾滅族)이라고 불릴 정도의 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서 청 제국은 신장(Xinjiang)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청은 정복 이후 군정(군사 통치)과 이민 정책을 실시하여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등을 이 지역에 이주시켰으며, 준가르 지역은 이후 “서쪽 변경의 안정”을 상징하는 제국 확장의 완성으로 여겨졌다. 또한 청은 이후 티베트 불교의 고승(특히 달라이 라마)을 제국 체계에 포섭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 대한 관리 체계를 강화했다. 이는 청 제국이 단순한 한족 중심 왕조가 아니라, 다민족 제국으로서 유라시아적 통합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련교도의 난

당시 청나라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음에도 경작지와 농업 생산력은 그만큼 늘지 않아 토지 부족과 빈농 증가가 심화하였다. 또한 지방 관료의 부패로 세금이 과중하게 징수되어 농민들은 가난해지고 빚에 시달리며, 지주나 부농에게 예속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민간 불교·도교 혼합 종교인 백련교는 구세주 사상과 도덕적 평등을 강조했으며, 억압받는 빈농과 부랑자, 노동자들을 사이에 퍼져 1796년 호북성 서북부의 봉기를 발단으로 하여 각지에서 반권력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이는 백련교도의 난이라고 불리며, 청나라의 쇠락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다.
이를 청나라는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지만, 청의 재정을 파탄나게 하고, 청나라의 관료 부패, 행정 무능 뿐만 아니라 군사적 무능을 각지의 유력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또한 이때 백련교도들을 진압할 때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것은 관군이 아닌 단련(團練, Tuanlian)이라는 제도하에서 조직된 향용(鄉勇)이었다. 향용은 마을 단위의 자치 군사조직이며, 반란이 빈번해지자 중앙정부가 통제하기 어려워지면서, 각 지방의 유력자들이 직접 군을 조직하게 됨에 따라 발달하였다. 이는 후일 중앙보다 강력한 지방 군벌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19세기 들어 동시다발적인 각종 내란과 외세 침략에 의해서 시달리게 된다. Figure 3은 19세기 청 제국의 내란과 외세 침략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상황을 시각화한 것이다. 보라색은 태평천국의 난, 주황색 지역은 다른 반란들이 일어난 지역, 파랑/보라색 화살표는 영국, 프랑스, 일본의 침공 경로를 보여준다.
1차 아편전쟁

1차 아편전쟁의 배경은 청나라의 무역 구조이다. 1757~1842년까지 청나라는 ‘광저우 체제(Canton System)’를 통한 무역을 고수하였다. 이는 광저우 한 곳에서, 정해진 시기와 지정 상인(‘공행 Cohong’)을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하게 한 제도이다. 이는 청나라가 자국 중심의 전통적 조공무역 질서의 연장선 상에서 무역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청나라의 쇠퇴가 가속화되고 서구 열강이 부강해짐에 따라, 세계 무역체제 속에서는 점차 폐쇄적 구조가 한계에 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은 광저우 체제 하에서 막대한 양의 은화가 청나라로 유출되고 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영국은 막대한 양의 아편을 청나라에 밀수출하였다. 아편은 청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을 중독의 늪으로 몰아넣어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개혁관료인 린쩌쉬(林則徐, Lin Zexu)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아편 단속을 진행했다.[1]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1839년에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해 불태웠는데, 이는 아편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은 영국에 비해 매우 빈약하였기 때문에, 청나라는 영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압도되었다. 청나라는 결국 1842년 8월 29일, 영국 군함 HMS Cornwallis 위에서 불평등 조약인 는 난징조약(Treaty of Nanking)을 체결한다. 이는 아래와 같은 사항을 포함한다:
- 홍콩 할양 (to Britain)
- 5개 항구(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개항
- 영국 상인에게 치외법권 인정
- 대규모 배상금 지불
이는 청나라가 주도하는 조공질서와 광저우 체제를 붕괴시켰으며, 근대적 국제질서로의 강제적인 편입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불평등 조약 체제가 프랑스·미국·러시아 등 다른 서구 열강으로 확대되었다.
태평천국의 난
태평천국(太平天國, Taiping Heavenly Kingdom)의 난은 홍수전(洪秀全)이 주도한 대규모 종교적·사회혁명 운동으로, 청 제국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왕국(Heavenly Kingdom of Great Peace)’을 세우려 한 사건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1851년 광시(廣西)에서 반란을 일으켜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1864년 청군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14년간 중국 남부를 휩쓸었다.
홍수전

홍수전(洪秀全, Hong Xiuquan)은 태평천국의 난의 지도자이며, 기독교에 크게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홍수전은 과거시험 낙방 후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선교서적을 읽고 “자신이 천국의 사명자”임을 확신하였다. 그 후로 그는 기독교적 환상과 계시를 기반으로 자신을 “예수의 동생, 하나님의 둘째 아들”로 자처했으며, 청 황제(‘악마의 세력’)를 몰아내고 하느님이 다스리는 ‘천조(天朝)’를 세우겠다는 종교적·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태평청국의 난은 기독교적 이상국가 건설을 내세운 종교혁명의 성격을 띄게 되었으며, 여성 평등, 토지 재분배, 유교적 질서 타파 등 급진적 사회개혁을 추구하게 되었다.
특히 홍수전은 객가족(客家, Hakka)인데, 객가족은 전쟁으로 중원에서 남하한 한족의 후손이다. 이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토지 부족에 시달리며, 종종 ‘이방인적 정체성’을 가졌다. 이러한 사회적 소외감이 반(反)청, 반(권위)적 태도로 이어져 태평천국의 사회혁명 성격을 강화했다.
태평천국의 난의 성격
태평천국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먼저 “태평(太平)”은 대동(大同)과 평화의 이상 세계를 뜻하며, 혼란한 청말 사회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유토피아적 구호이다. 또한 “천국(天國)”은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로, 홍수전이 세우고자 했던 기독교적 이상사회를 의미한다. 즉, 태평천국은 단순한 반란 세력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신정(神政) 혁명 국가로 자신들을 정당화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기 이전의 비밀결사조직들은 남중국 지방에서 반청(反淸) 운동과 종교적 결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조직이 천지회로, 만주족의 청 왕조를 타도하고 명(明)의 복위를 도모한다는 목표를 가졌다. 이러한 조직들은 지방 공동체 단위의 형제결의·비밀조직망을 발전시켜, 훗날 태평천국운동의 조직적 모델이 되었다. 즉, 태평천국은 이 같은 비밀결사 문화와 반청 정서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대규모 운동이었다.
청나라에서의 기독교 수용
청나라에서 기독교는 태평천국에 대해서만 영향을 준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예수회 선교사는 발달한 과학·천문학·지리학을 통해 황제의 신임을 얻었으며, 강희제 혹은 건륭제는 기독교를 제국 질서 속에 ‘통제된 형태로’ 수용하였다. 즉, 청 왕실은 "예수회 기독교"를 종교가 아닌 지식과 권력 중심으로 도구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태평천국은 기독교를 도구적인 성격을 넘어 종교적으로 보았다. 이는 홍수전으로 하여금 하늘의 법 아래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를 실제로 구현하고자 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전통 유교의 남녀유별 규범을 거부하고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목사·찬송·기도 등 프로테스탄트 예배 형식을 모방한 것이 있다. 즉, 태평천국은 종교를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윤리와 제도 개혁의 근거로 사용했으며, 여성 평등, 금주·금연·금도박 등의 도덕 규율을 통해 신정국가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유교 사상 비판
양공발(梁恭發, Liang A-Fa)은 홍수전에게 기독교 사상을 전파한 선교 보조자이자 개신교 문헌 번역자이다. 그는 광저우(廣州)에서 활동하던 중국 최초의 개신교 전도사 중 한 명으로, 그의 전도서 『권세양언(勸世良言, Good Words to Exhort the Age)』이 홍수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또한 권세양언에는 유교를 비판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주로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다:
- 유교의 도덕 중심 세계관을 배격하고, 유일신 사상(一神論)을 제시
- 학문과 관직 출세를 위한 신앙이 아닌, 도덕과 구원의 신앙을 강조
- ‘하늘(天)’을 전통적 의미가 아닌, 기독교적 신(God)으로 재해석함
또한 아래는 권세양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과거제를 비판하는 부분이다:
유학(儒學)의 실행은 허영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다. 학자들은 문창제(文昌帝)와 괴성(魁星)의 신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들의 보호를 간청한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면서 이 두 신상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느끼며, 향시(鄕試)나 회시(會試) 같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모두가 늘 이 두 신을 숭배하는데도, 어린 시절부터 평생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온 사람들이 일흔, 여든이 되도록 가장 낮은 급제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중략)
이로부터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유학자들은 욕망에 눈이 멀어 집착하고, 헛된 환상에 사로잡혀 우상을 섬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천지의 주재자, 온 세상과 그 부귀영화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도(道)의 원칙에 따르지도 않는다.
즉, 권세양언은 유교적 지식체계와 시험제도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담고 있으며, 이후 태평천국이 유교질서를 거부하는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래는 홍수전이 공자에 대해 언급한 말이다:
공자는 높은 하늘에서 모든 신들이 자신을 죄인이라 단죄하는 것을 보고, 몰래 하늘에서 도망쳐 내려와 마귀들의 우두머리에게 붙으려 하였다. 이에 천부(天父) 곧 지존한 상제(上帝)께서 홍수전과 천사들의 무리를 보내어 공자를 쫓게 하셨고, 그를 결박하여 천부 앞에 끌고 오게 하셨다. 천부는 크게 노하여 천사들에게 그를 매질하도록 명하셨다. 공자는 하늘의 맏형(長兄)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의 불쌍한 탄원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자 천부는 생각하시기를, 공자의 공로가 허물보다 많다고 여기시고, 그가 하늘의 복을 조금은 누리도록 허락하셨다.
위의 인용문은 기독교적 신(하느님, 그리스도)을 중심에 두었고, 유교의 성인인 공자(孔子)를 오히려 잘못된 신앙과 세속적 욕망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또한 홍수전은 자신을 하느님이 보낸 천사로, 기독교적 정의로 유교적 질서를 심판하는 사명자로 묘사하여, 그가 이끄는 태평천국의 반유교적 세계관을 극명히 드러낸다.
태평천국의 난의 전개와 결과

Figure 6은 1854년경 태평천국이 장악한 영토를 보여준다.[2][3] 태평천국은 1853년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천경(天京)”으로 개명,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당시 인구 약 3천만 명을 지배하며, 한때 청 제국의 절반 이상을 위협했다. 하지만 약 2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끝에, 결국 난은 내부분열과 외세(서양)의 개입으로 1864년에 태평천국은 결국 진압되었다.
이때 태평천국 진압의 핵심 인물로는 증국번(曾國藩, Zeng Guofan)과 이홍장(李鴻章, Lǐ Hóngzhāng)이 있다. 증국번은 호남군(Hunan Army)을 창설하였는데, 호남군은 태평천국운동(1850–1864)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향용(鄉勇) 기반의 지방 민병군이다. 이는 중앙의 팔기군(八旗軍)과 녹영(綠營)이 무력화되자, 지방 엘리트가 자체적으로 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증국번은 후일 이홍장을 천거하였으며, 그들은 태평천국 진압에서 발군의 진압 역량을 보여줬다. 또한 그들은 청의 자강운동(Self-Strengthening Movement)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성리학적 충성심과 실용적 기술개혁을 결합시켜, ‘유교적 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2차 아편전쟁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생각보다 큰 돈이 되지 않았다. 영국제 면직물은 청나라에서 별로 인기가 없어서 청 수출은 여전히 아편에 의존하고 있었던 데다 그마저도 청이 아편을 자체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아편 판매를 통한 수익이 감소하고 있었으며 자유무역 덕분에 역으로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해버려 영국의 무역적자가 다시 증가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떄문에 영국은 전쟁을 한번 더 일으키기를 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 수군이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 선박 애로(Arrow)호를 단속하였다. 애로우 호는 소유주만 영국인일 뿐 모든 승조원은 청나라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해적임이 분명했기에 청의 정당한 공무집행이었으나 영국은 단속 과정에 명예로운 자국 국기가 훼손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했다. 이는 정당한 명분이 아니었으므로 영국 하원마저도 전쟁 안건을 부결시켰고,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은 아예 내각불신임안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당시 총리였던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은 하원을 해산해 버리면서까지 개전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에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 오귀스트 샤프들랭이 광서성에서 처형된 것을 구실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청나라는 열강들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패퇴를 거듭하였고, 결국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아래의 내용을 1년 뒤에 비준하기로 하였다:
- 배상금 지급
- 개항항구의 확대
- 베이징에 외국 외교관 상주 허용
- 기독교 공인
- 장강 통행 및 외국인의 중국 내륙 여행 자유를 허용

하지만 그럼에도 청나라와 열강 사이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열강들은 다시 베이징을 점령하여 청을 완전히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열강들이 베이징으로 진격할 즈음 공포에 질린 함풍제와 전쟁을 주장하는 청나라 대신들은 일제히 열하로 달아났다. 이윽고 베이징 외곽에 도착한 연합군은 청 황제의 개인정원이자 전 세계에서 진상된 각종 물건들을 모아놓은 보물창고였던 원명원으로 진격해서 전부 약탈한 후 완전히 때려부수어 파괴해버렸다.
베이징이 점령되자 당시 청 조정은 다급한 나머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신식 군대를 이끌고 태평천국군과 대치하던 증국번과 이홍장에게 병력을 베이징으로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증국번과 이홍장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었는데 아직 난이 진압되지 않는 상태에서 병력을 보냈다간 전황의 균형이 무너질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그들은 크게 의미가 없는 실무적인 질문 보고를 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청나라는 항복하여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톈진 조약의 비준
- 추가 항구 개방
- 추가적인 전쟁 배상금
- 구룡반도 할양
- 통상/선교의 자유
- 양쯔강에서의 군함 항해 허용
- 러시아에 연해주 할양
이로 인해 청 제국은 완전히 ‘조공체제’에서 강제로 근대 국제체제로 전환되게 되었다. 이는 중국의 해안 도시들이 반식민 경제 거점으로 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상하이, 톈진, 홍콩 등은 이후 근대 중국의 산업·금융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청 제국의 주권 침해와 경제 종속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서양 열강들과 일본은 청을 대국, 동양의 잠자는 사자 같은 '침묵의 강자'라는 신비로운 강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괜히 건들지 않으려고 선뜻 선전포고를 걸지 않았으나 아편 전쟁 이후 허약한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청은 순식간에 서구 열강과 일본의 덩치 큰 호구로 전락했다. 결국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로도 청은 계속 서구 열강들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2000년간의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치중흥
제2차 아편전쟁(1860)과 태평천국운동 이후, 청 제국은 내외 위기를 동시에 겪으며 통치 정당성이 크게 흔들렸다. 황제(동치제) 대신 섭정한 서태후(Cixi) 와 개혁파 대신(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은 “서양의 기술로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자” 는 자강운동인 동치중흥을 추진했다. 이때 자강운동의 핵심 모토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는데, 이는 "중화의 몸을 유지하되 서양을 사용하자"라는 의미이다. 즉, 서양의 정치제도는 배척하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달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아래와 같았다:
- 군사력 강화: 서양식 무기, 조선소, 병기창 설립
- 산업화와 경제 개혁: 철도·전신망·기계공장·상공업 육성
- 교육 개혁: 통역학교, 해외 유학생 파견, 기술교육
펑구이펀(冯桂芬, Feng Guifen)은 자강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시한 학자이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하여 동치중흥의 정신을 함축하였다:
세상을 뒤흔드는, 인류 역사 이래 전례 없는 격노가 모든 혈기가 있는 사려 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지금 소수의 오랑캐들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그들의 인민이 특별히 비상한 체격을 가진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인민이 왜소한 난쟁이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들과 견줄 수 없는가? 이것은 타고난 천성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인간적 원인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열등함이 천부적인 자질의 차이 때문이라면 그것은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으로 열등하다면 그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가장 올바른 일은 ‘자강(自强, self-strengthening)’하는 것이다. 즉, 그는 중국 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서구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중국의 주체적 대응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자주적 근대화론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자강운동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히는 것 중 하나는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 Jiangnan Arsenal)이다. 이는 865년, 상하이 근처에서 이홍장(李鴻章)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는 당시 청나라의 근대적인 군사공장으로, 서양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최신식 대포·함선·탄환을 제조하고, 군사 기술서 번역·교육을 함께 시행하였다. 또한 공장 내에 역서국(譯書局, Translation Bureau) 을 두고, 수학·물리학·공학·지리학 등 서양 과학서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이는 청나라 말기 신학문 계층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또한 Figure와 같이 19세기 말, 자강운동의 성과로 중국도 점차 근대 교통·통신망을 구축하였다. 이때 철도는 군사 이동과 상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지만, 그 건설과 운영은 종종 서양 자본에 의존해 “경제 종속”으로 이어졌다.
동치중흥은 유교적인 체제 아래에서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야심찬 계획과 달리, 서양 기술을 수용했지만 정치 제도 개혁(헌정·입헌 등) 은 병행되지 않아 “기술은 근대적, 체제는 전근대적”인 모순 구조를 만들었다. 결국 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청나라가 체제 개선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메이지유신과 청일전쟁
청나라가 동치중흥으로 인해 “기술은 근대적, 체제는 전근대적”인 모순 구조를 겪은 것과 달리,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 군사력(서양식 무기·훈련)을 갖춘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일본은 원래 나가사키 항구에서만 네덜란드와 중국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제한적으로 접하였으나,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불평등 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강제로 서양 세계에 문을 열게 되었고, 이는 이후 급격한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때 일본이 운이 좋았던 것은 조약 체결 후 8년 후에 미국이 남북 전쟁으로 일본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고, 일본은 외세로 부터 상당히 자유롭게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메이지 천황은 건적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수립했으며, 메이지 유신(1868)을 통해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서양식 군대, 헌법, 산업, 교육제도를 도입해 “부국강병(富國強兵)”을 추진했으며, 이때 일본의 근대화는 천황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입헌군주제 하에 정부·의회가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천황 중심의 체제가 시행되었다. 일본은 근대 정치제도를 형식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문명국’의 외형을 갖추고, 서양 열강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
일본은 1879년 류큐 왕국을 강제 병합하여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였다. 이는 메이지 정부의 첫 해외 확장 시도로, 제국주의 팽창의 시작을 상징한다. 또한 청나라가 이를 저지하지 못하면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이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 이때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되었다. 청나라에게 조선은 그들의 세계관을 지탱할 마지막 기둥과 같은 존재였으며, 일본에게 조선은 그들의 팽창욕의 대상일 뿐 아니라 청나라에게 까지 패권을 투사하기 위한 요충지였다. 이에 일본과 청나라는 결국 청일전쟁에서 충돌하였으며, 일본군은 조선과 요동반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의 베이양함대를 격파하고, 대만(타이완)을 점령하였다. 이는 부패, 비효율, 지역 분산으로 인해 근대화 효과가 제한적이었던 자강운동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결국 전쟁의 결과로 시모노세키 조약(Treaty of Shimonoseki, 1895)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는 일본에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의 주요 조항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 일본의 최혜국 지위 인정
- 조선의 독립 승인(조선에 대한 세력 투사를 위해서이다.)
- 대만·요동반도를 일본에 할양(대만은 1945년까지 일본 식민지)
이는 중국 중심의 조공질서가 붕괴되고, 일본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가 등장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