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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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go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9월 17일 (수) 17:47 판 (흉노(匈奴))

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해당 문서에서는 중국 최초의 제국인 진(秦, Qin)나라의 제도, 구조, 확장을 이해하여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설명한다. 또한 법가 사상에 기반한 개혁과 국가적 표준화 정책을 시황제(始皇帝, first emperor) 치하에서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흉노(匈奴, Xiongnu)라는 유목민 집단의 사례를 통해 유목적 연맹체의 역사적 역할을 설명한다.

춘추전국시대 때의 진나라

진(秦)은 원래 서주(西周) 지역의 변경 국가로 출발하였다. 이 때문에 중앙의 주된 국가들로부터 ‘반(半)야만인’으로 여겨졌다. 진나라는 변방에 위치하고, 그 특유의 군사 문화는 진나라가 방어와 공격 능력을 동시에 발전시켰다. 또한 진나라는 풍요로운 위수(渭水) 강 유역을 천연 방어선으로 활용하며, 공격적인 군사 전략을 통해 경쟁국들을 약화시켰다.

전국시대(戰國時代, warring states)는 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주나라 왕실의 권위마저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이에 따라 전국시대는 완전한 약육강식과 총력전의 논리가 중국 대륙을 지배한 475–221 BCE 동안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 동안 각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통치 혁신과 군사 조직의 발전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다양한 사상 실험이 이루어졌으며, 그 중 진은 법가(法家)에 기반한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하였다.

상앙(商鞅)의 초기 개혁

상앙(商鞅)은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진나라 궁정으로 초빙되어 진나라의 초기 개혁을 주도한 법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세습 영지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를 재분배하여 귀족 특권을 약화시키는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다. 또한 그는 연좌제(連坐制, Mutual Responsibility System)를 실행하였다. 그의 연좌제는 가구들을 5호 혹은 10호 단위로 묶고, 구성원 전체가 서로의 행동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는 형식이다. 해당 구성원 내에서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보고하지 않으면 집단 처벌을 하였고, 국가 차원의 감시망·통제체제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민간 사회까지 국가 통제가 깊숙이 침투하였으며, 백성들 사이의 감시와 두려움을 통해 법 준수를 강제하였다. 이를 통해 공포 정치와 충성 유도를 동시에 구현하였다.

능력주의와 군사제도

진나라는 능력주의(Meritocracy)에 기반하여 국가를 운영하였다. 이는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전공(戰功)에 따라 승진·토지·부를 보상하는 방식이다. 또한 진나라는 규율에 따르는 대규모 상비군을 운용하였다. 이러한 진나라의 능력주의와 군사제도는 군사력이 곧 생존을 결정하던 전국시대에 맞는 실용적 개혁이었다. 또한 이는 귀족 사회를 붕괴시키고, ‘출신보다는 실력’이라는 새로운 가치관 확립시켰다. 이는 후일 진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군사적 기초가 되었다.

법가 사상과 진나라

법가는 인간 본성은 이기적이므로,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력과 법의 엄정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법가에서는 근대적 ‘법치주의’와 달리, 법을 국가 권력의 절대화를 위해 도구화한다. 따라서 법가의 가장 핵심적인 세 요소는 법(法, 법), 술(術, 통치의 기술), 세(勢, 군주의 권위)이다. 즉, 유가(儒家)가 인간의 도덕적 선을 강조했다면, 법가는 현실적이고 냉혹한 인간관에 기반한다. 이와 관련한 법가 사상가 한비자(韓非子, Han Fei Zi)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형벌이 무겁고 상이 후하면 백성들은 군주의 명을 따른다.”

이는 상벌을 통해 백성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법가적인 신념을 잘 보여준다. 또한 이는 국가와 백성 간 관계를 ‘신뢰’나 ‘도덕’이 아니라 외적 제재로만 묶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진나라는 전국시대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법가사상을 채택하였다. 이에 기반하여 진나라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봉건 귀족 칭호를 폐지하고 임명 관료제를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제국을 군(郡, commandery)과 현(縣, county)으로 나누어 모든 관리들이 중앙정부(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진나라는 봉건적 분권체제에서 벗어나, 황제 중심의 절대 권력 구조 확립했다. 이는 군현제(郡縣制)가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정착한 것이었으며, 이후 중국 제국 체제(한·당·송 등)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표준화 정책

진나라는 도량형(무게·길이), 화폐, 수레 바퀴 간격까지 통일하였다. 이를 통해서 경제적·문화적 통합은 물론 효율성까지 높였다. 진나라가 제정한 표준 문자 체계는 소전(小篆, Small Seal Script)라고 하며, 기록·조세·행정 문서에서 통일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언어적 통일은 행정 효율성과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이러한 표준화 정책은 다양한 국가들이 하나의 제국으로 묶이기 위해 필수적 조치였으며, 상거래, 세금, 군사 물류에서 혼란을 줄였다. 또한 경제적 통합을 통해 제국 유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시황제

기원전 221년, 진 왕 영정(嬴政, Ying Zheng)이 전국을 통일하고 “황제(皇帝, emperor)”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진시황(秦始皇, first emperor)으로 불리게 된 그는 자신의 왕조가 “만세(萬世, 만세의 세대)”동안 이어지기를 바랬다. 따라서 그는 천명(天命, Mandate of Heaven)과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거대한 토목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시황제는 광대한 제국을 직접 시찰하기 위해 순행(Imperial Tours)을 자주 실시하였다. 각 지역에 석비(石碑, Erected stone inscriptions)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새기고 선전하였다. 이는 백성들에게 황제의 권위와 존재감을 직접적으로 과시하였다.

또한 그는 영남(嶺南, Lingnan)[1]과 민월[2](閩越, Minyue) 등에 군사 원정을 진행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한 북쪽의 흉노(匈奴, Xiongnu)를 오르도스(Ordos) 지역 너머로 밀어내었다. 이렇게 새로 얻은 정복지들을 군현제(郡縣制)로 편입하여 중앙에서 직접 통치하여 완전히 흡수하였다.

대규모 토목 공사

그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한 황제로 매우 유명하다. 그 중 유명한 것은 병마용, 진시황릉, 만리장성, 아방궁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병마용갱(兵馬俑, The Terracotta Army)은 현재 온전히 남아 있고, 발굴이 된 몇 안되는 진시황의 유산 중 하나이다.[3] 병마용갱은 실제 크기로 만들어진 토용 병사들을 진시황릉 근처에 묻어놓은 것이다. 이는 197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근교에서 농부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또한 각 토용의 얼굴이 모두 달라 "실제 군대의 개개인"을 반영하고자 했다는 설이 있다. 해당 토용들은 일렬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전투 대형(陣形)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는 무덤을 군대로 방어하고, 황제가 저승에서도 안전하게 군림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수천 개의 병마용 제작은 엄청난 자원, 노동력, 기술을 필요로 하며, 이는 황제가 얼마나 막대한 권력과 국가적 동원 능력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또한 그는 대규모의 인프라 산업들을 진행하였다. 먼저 진나라는 제국 통치 효율성을 위해 도로망을 전국에 건설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수도 함양(咸陽)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 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그는 운하를 축조하여 농업용수 공급에 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군수 물자와 군대 이동에도 활용하였다. 이러한 인프라는 단순한 경제적 기반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 강화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들은 백성들에게 막대한 노동 부담을 안겼다. 농민들은 농번기 이외의 기간에 강제로 동원되어 장거리 도로·장성·궁궐·릉묘를 건설하였다. 또한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따라 부역 부담은 민심을 이반시켰고, 훗날 진나라 붕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진시황과 법가주의

진시황은 가혹하게 법가주의를 국가에 적용하였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나, 범죄에 대한 처벌은 벌금, 강제노역, 신체 절단, 심지어 사형등 매우 잔혹하였다. 이러한 잔혹한 법은 가족이나 이웃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었고, 집단 처벌이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에 사회 질서는 유지되었지만 두려움과 불만이 만연하였다. 후대 유가 학자들은 이를 “폭정(暴政, tyranny)”으로 규정하였다.

진시황 법가사상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분서갱유(焚書坑儒, Burning of books, burying of scholars) 사건이다. 이는 기원전 213년, 법가 이외의 책들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탄압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역사서·철학서·시가집 등 유가 및 다양한 지식의 전통이 파괴되었다. 황제의 권위와 이념 통일을 위한 조치였지만, 후대에 "사상의 독재"로 비판되었다. 특히 유학자 집단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으며, 한나라 이후 “분서갱유”는 진나라 폭정의 상징으로 회자되었다.

불로불사와 죽음, 진나라의 멸망

진시황은 불로불사에 대한 편집증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말년에 불사의 영약을 찾는 데 몰두하였다. 이에 따라 방사(方士)들을 보내 바다 동쪽의 봉래산, 영주산 등 신선이 산다는 곳을 탐사시켰다. 이러한 요구에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사들이 수은(水銀)이 포함된 불사의 약을 조제했는데, 오히려 건강을 해쳐 사망을 앞당겼다. 이는 그의 정치적 야망과 종교적·미신적 요소가 결합된 사례이다.

불로불사에 대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210 BCE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사후 진나라는 후계 문제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였다. 그의 사후 권신 조고(趙高) 등은 황제의 죽음을 은폐하고,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2대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러나 호해는 무능했고, 폭정으로 민심을 잃었다. 진나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백성들의 봉기와 반란을 촉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Dazixiang(大澤鄕) 지방에서 209 BCD에 일어난 진승과 오광의 난(陳勝吳廣之亂)은 전국적인 반란과 봉기를 촉발하였다. 이후 유방(劉邦, Liu Bang)과 항우(項羽, Xiang Yu)에 의해 진나라는 기원전 206년, 불과 15년 만에 진나라가 붕괴하였다. 이후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다투며 중원 대륙은 초한전쟁(楚漢戰爭)을 겪는다.

흉노(匈奴)

흉노(匈奴, Xiongnu)는 북방 초원의 유목 연맹체(nomadic confederation)이며 기마 전술에 뛰어나다. 흉노족은 농경 사회 지역(중원)에 대한 반복적인 침입과 약탈을 감행하였고, 이러한 침입은 진나라의 만리장성 등의 축성을 촉발하였다. 진나라의 북방 정책은 단순히 외적 방어가 아니라, 유목민과 농경민의 대립이라는 장기적 역사 구도의 시작이며, 중국과 유목민의 갈등 구조가 이후 한(漢)대까지 이어진다.

흉노는 목축 중심의 이동 생활(mobile pastoralism)을 하여 계절에 따라 풀과 물을 따라 이동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정착 농업(agriculture)과 영구적 기반시설(permanent infrastructure)을 기반으로 경제를 운영했다. 이런 생계 방식 차이가 자원(토지·수자원) 충돌을 유발하였다. 이에 따라 국경 지역은 항상 갈등 지역이 되었고, 중국-초원 관계의 반복적 긴장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기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그들은 풀과 물을 따라 옮겨 다니며, 성곽 도시나 고정된 주거지를 두지 않았다.”

이는 성곽·도시·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진과는 달리, 흉노는 유목적 이동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흉노와 같은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진나라는 만리장성(萬里長城, The Great Wall)을 축조하였다. 이는 기존에 각 제후국이 쌓아두었던 성벽들을 연결·확장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며, 이를 위해 엄청난 인력을 동원하였다. 만리장성은 비단 군사적인 방어 기능 뿐만 아니라, “중화 문명”과 “야만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진나라의 유산

진나라는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으로,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처음으로 중앙집권적 제국으로 통일하였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 차원의 표준화(도량형, 화폐, 문자, 도로 폭 통일)를 시행하였다. 또한 중앙에서 지방을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후대 한(漢)·당(唐)·명(明) 등 2000년 동안 중국의 기본 행정 체제로 계승되었다. 또한 진나라의 법가는 지나치게 가혹하여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질서 유지와 국가 통제의 효율성 면에서는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이후 왕조들은 법가의 효율성과 유교적 도덕주의를 절충하며 발전시킴.

진나라가 멸망한 뒤 세워진 한(漢) 왕조의 역사가들은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와 법가적 잔혹성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사기(史記)와 같은 기록에서 진시황은 폭군적 이미지로 그려진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진나라를 단순히 “폭정”으로만 보지 않는다. 효율적 행정 체계, 통일 정책, 국가 건설의 토대 마련을 높게 평가하며, 비록 짧은 왕조였지만 중국 역사에서 전환점을 만든 결정적 시기였다고 본다.

각주

  1. 오늘날 광둥성에 해당한다.
  2. 오늘날 푸젠성(福建省) 중심 지역이다.
  3. 진시황릉은 발굴되지 않았으며, 만리장성은 망가지고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또한 아방궁은 항우에 의해 화마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