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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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한나라(漢, Han Dynasty)는 기원전 202년 유방이 건국한 고대 국가로, 초한대전(楚漢大戰)에서 서초의 항우를 상대로 승리한 BCE 3세기부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들어서기 직전 후한이 멸망한 3세기 전반까지 존재한 왕조이다. 진(秦)의 뒤를 이어 통일된 중국의 기반을 자리잡게 한 제국이다. 그래서 진과 한을 묶어 진한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록 중국 최초의 통일은 진나라에서 이뤄졌으나, 역사가 워낙 짧아서 중국의 첫 통일 국가의 온전한 모습을 보인 것은 한나라이다.

진나라의 붕괴

진나라는 가혹한 법, 강제 노역, 과도한 확장과 군사 원정 등으로 통일 후에도 백성들의 불만을 충분히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진시황(秦始皇, first emperor) 사후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의 봉기가 발생해 체제 기반이 흔들렸다. 비록 그들의 봉기가 실패로 끝났음에도, 이후 진나라는 유방(劉邦, Liu Bang)과 항우(項羽, Xiang Yu)의 반란군에 의하여 결국 멸망한다. 이후 유방과 항우는 천하를 차지위한 패권(supermacy) 경쟁을 한다. 그 과정에서 민심을 얻는데 성공했던 유방은 결국 항우를 물리치고 206 BCE에 한 고조(Emperor Gaozu)로 즉위했다. 그는 지나치게 가혹했던 법과 세금을 완화해 민심을 얻었다. 또한 일부 제후들에게 봉토를 주어 봉건적 요소를 일부 회복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중앙집권을 유지했다. 그는 이렇게 진나라의 장점(중앙집권)과 단점(과도한 법가식 억압)을 조정하여 보다 온건한 체제를 구축했다.

한나라 사회

정부 구성과 중앙 집권화

한나라는 진나라의 관료제 틀은 유지했지만, 그 엄격함과 가혹함을 완화했다. 중앙 정부는 삼공구경(三公九卿, three lords and nine ministers) 체제를 통해 국가를 운영했다. 삼공은 최고위 직책(승상, 태위, 어사대부)이고, 구경은 각 분야의 주요 장관을 의미한다. 이때 관리 등용은 혈통보다는 능력과 지역 사회 추천을 중시했다. 이는 후대 과거제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한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제국을 군(郡, commandery)과 현(縣, county)으로 나누어 행정 단위를 체계화했다. 지방 관리들은 황제에게 책임을 지지만, 동시에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하여 통치 효율을 높였다. 이때 주·군·현의 감독관은 중앙 정부에서 임명하여, 지방의 권력이 독립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가족이나 이웃이 범죄를 저지르면 모두 책임을 지는 연좌제(상호 책임 제도)를 유지해 세금 징수와 치안을 보장했다. 이러한 제도적인 방식을 통해 중앙 통제와 지방 자치의 균형을 유지했다.

경제 회복 정책

한나라가 통일 후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진나라의 노역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업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나라 정부는 가벼운 세금 정책을 실시하고, 국가가 직접 관개와 운하 보수를 지원해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렸다. 또한 내부 무역과 시장 발달을 장려해 경제 활력을 되찾았다.

후대에는 소금과 철의 전매 제도를 통해 국가 차원의 자원 독점을 실시해 재정적인 기반을 강화하였다.

신분제와 여성

한나라에서 천자(天子, Son of Heaven)로, 신의 뜻에 의해 통치한다고 여겨졌다. 한나라에서 신분제는 유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을 기반으로 하였다. 사대부(유학자 관리)는 황제를 도와, 혹은 그 권위를 앞세워 통치하였다. 농민은 사회의 근본이자 생산의 기반으로서 중시되었다. 하지만 장인, 공인, 상인은 꼭 필요하였음에도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사회적 평판은 낮게 평가되었다.

한나라의 상류층 여성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고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Empress Lü)가 황실 권력을 장악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이는 거의 모든 여성에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여성 교육서인 반조(班昭, Ban Zhao)의 여계(女誡, Lessons for Women)는 여성의 덕목(순종, 절제, 근면 등)을 강조했다. 평민 여성은 주로 가사, 농사, 직물 생산을 담당했다. 또한 귀족 가문 간의 혼인 동맹은 정치적 연합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한나라와 유교

한나라, 특히 한 무제(武帝, Emperor Wu) 시기에 국가 이념으로 유교가 부흥했다. 진나라 시기에는 법가가 지배적이었지만, 한나라는 사회적 조화와 도덕적 정당성을 위해 유교를 선택했다. 이는 황제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교의 부흥이 한나라 시대에 법의 중요성의 퇴보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유교가 말하는 백성의 교화를 위해, 진나라보다 형벌을 완화하였고, 특히 경범죄에 대해서는 도덕적 교화(유교적 설득)를 우선시했다. 또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서 지방의 현령들이 분쟁을 재판했으며, 상급 관료에게 항소도 가능했다. 이와 같이 법은 단순한 처벌 도구가 아니라 유교적 도덕 질서를 강화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동중서(董仲舒, Dong Zhongshu)는 한 무제에게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할 것을 적극 주장한 학자이다. 그는 "천(天), 지(地), 인(人)은 하나다.", "군주의 덕이 우주의 조화와 직결된다"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황제가 도덕적으로 올바를 때 세상은 평화로우며, 자연재해는 하늘이 군주의 잘못을 경고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한나라와 흉노족

한나라는 상비군과 국경 수비대가 제국의 방어를 담당했다. 당시 한나라는 이민족으로 부터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쪽의 월(越, Yue), 전(滇, Dien)과 북쪽의 흉노(匈奴, Xiongnu)에 대한 원정을 통해 국경을 확장하거나 방어했다. 또한 국경 지대에는 전략적 요새와 성곽을 건설하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이때 군 복무는 백성에게는 의무이자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출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흉노와의 갈등

흉노는 중국 북쪽의 유목민 세력으로, 기마와 활에 능했다. 그들은 매우 기동성이 뛰어나 한나라 영토 깊숙이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또한 교역로와 초지를 장악해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세력이었다. 흉노는 선우(單于, Chanyu)라는 통합 지도자[1] 아래 강력한 연맹을 이루어 한나라에 큰 전략적 위협이 되었다.

흉노와의 화친 정책

한나라는 흉노의 강력한 군사력을 두려워해 흉노와의 갈등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화친(heqin)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한 황실 공주를 흉노 우두머리와 혼인시키거나, 흉노에게 비단, 곡식, 술 등을 선물하여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군사 충돌 대신 외교적 방법으로 비용을 줄이고자 한 전략이다. 이는 흉노와 한나라 사이의 양국 관계를 완화하고,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는 등의 평화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어서, 평화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 정책은 이념적이라기보다 실용적(pragmatic)이었으며, 전쟁 비용을 줄이는 방편이었다.

실크로드

실크로드(Silk road)는 대항해시대 이전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지중해 세계를 잇던 동서 교역망을 의미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한나라의 비단과 같은 사치품이 중앙 아시아와 그 너머로 수출되었다. 이를 통해 한나라는 세금과 관세, 무역 관리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상인들은 물품과 함께 사상, 예술, 종교도 전파하며, 단순한 경제 교류자 뿐만 아니라 문화적 중개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때 실크로드는 단순한 무역로가 아닌, 전쟁과 교류가 공존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였다. 한나라와 북방 유목민(특히 흉노)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이 있었지만, 동시에 무역과 문화 교류도 활발했다. 초원지대에서 생산된 말, 모피, 옥이 중국으로 들어왔고, 중국은 비단과 곡식을 수출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 교환이 아니라 군사·정치적 관계를 조절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 사신과 상인들이 국경을 오가며 정기적으로 교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불교, 미술, 음악 등 문화적 영향도 양방향으로 이동하였다.

한나라의 문화

한나라는 태학(太學, Imperial academy)들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치했다. 관료가 되려면 《논어》, 《맹자》 같은 유교 고전을 공부해야 했다. 또한 한나라는 여러 판본으로 흩어져 있던 경전을 정리하고 문헌 표준화(Text standardization)를 진행하여 정통 유교 경전의 권위를 확립했다. 또한 황실은 문학, 예술, 학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학문적 번영을 이끌었다. 이는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제국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사마천의 《사기(史記,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는 당시 한나라의 수준 높은 역사 서술의 정수이다. 사마천(司馬遷, Sima Qian)은 당시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지내었다. 그는 《사기》에서 신화적 과거부터 춘추전국, 진, 한에 이르기까지 통사(通史, 전체 연대기 역사)를 남겼다. 그는 황제를 직접 비판하지 않고, 역사적 저술을 통해 역사 속 사례를 들어 잘못된 군주의 행위를 경계하도록 했다.
그는 역사를 단순 기록이 아니라 도덕적 교훈을 주는 도구로 보았다. 즉, 그는 역사를 정치와 도덕을 이끄는 길잡이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사실 기록과 도덕적 해석을 결합해, 단순 연대기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았다.

종교와 신앙

한나라는 유교와 도교, 민간신앙의 혼합이 두드러진 사회였다. 유교적 윤리(효, 충, 예 등)가 정치 이념이 되었지만, 동시에 도교적 우주관과 민간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황제는 하늘(天)과 조상에게 국가 제사(State sacrifices)를 지내며 통치 정당성을 확보했다. 또한 동중서가 주장한 것과 같이, 천재지변이나 기이한 현상은 정치적 징조로 해석되었고, 국가 정책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도교적인 민간신앙이 성행하여 다양한 신과 토착 신앙이 성행했다.

한나라의 흥망성쇠

서한의 쇠퇴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한나라는 후기에 조정 내부에서 파벌 투쟁(factional struggles)이 심해졌다. 이에 따라 황실 친척, 환관, 대신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어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귀족과 대지주들이 토지를 집중적으로 소유하게 되면서 소농(小農) 계층이 몰락했다.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았고, 생활 기반이 무너졌다. 또한 북쪽의 흉노(Xiongnu)와 서쪽·남쪽의 여러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국경을 압박했다. 이는 군사적 긴장과 방어 비용에 대한 부담을 증가시켰다. 이는 농민의 불만을 폭발 직전으로 만들었고, 이는 후에 왕망(王莽) 집권과 신(新) 왕조의 등장을 예고하는 배경이 되었다.

신(新)나라의 일장춘몽

외척 출신인 왕망(王莽)이 9년에 황위를 찬탈하고 새로운 왕조인 신(新) 왕조를 세웠다. 그는 이상적 유교 질서 구현을 목표로 하여 토지 재분배(균전법 시도), 새로운 화폐 도입, 국가의 철·소금 등 주요 자원에 대한 국가 독점과 같은 여러 사회적/경제적 개혁을 실행하였다. 자연재해(홍수, 황하의 범람 등)와 대규모 농민 반란(특히 적미의 난)이 왕망의 개혁을 무너뜨렸다. 왕망은 23년에 사망하며 신 왕조는 단명했고, 25년에 한 왕조가 부활하여 동한(東漢, Eastern Han)이 시작하였다.

동한의 발전과 쇠퇴

동한은 수도를 장안(Chang’an)에서 낙양(Luoyang)으로 옮겼다. 동한은 그 전성기에 실크로드를 확장하여 중국과 서아시아·로마 제국까지 이어지는 교역망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유교가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확립되었으며, 교육과 정치 제도에 깊이 뿌리내렸다. 하지만 이후 환관들이 황제의 측근으로 권력을 잡으면서 정치 부패와 파벌 싸움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훗날 동한 쇠망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나라의 유산

한나라의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는 이후 중국의 모든 왕조가 본받는 전형이 되었다. 또한 유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며, 이후 수천 년간 중국 정치·사회질서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중국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漢族, Han Chinese)’이라는 민족 정체성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한 제국은 몰락했지만, 실크로드 무역과 외교 네트워크는 이후에도 유지·발전되었습니다. 이는 중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초석이 되었다.

각주

  1.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흉노족 전체를 아우르는 흉노국을 통치하는 '왕'과 같은 호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