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해당 문서는 현재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이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발달하기 시작할 당시,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은 신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그는 민주주의, 과학, 전통 타파, 농민 중심 혁명론 등을 흡수하며 사상적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었던 러시아 혁명의 노선과는 다르게, 중국에서의 “혁명의 중심은 도시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사상은 리다자오(李大钊, Li Dazhao)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베이징대 도서관장, 중국에서 초기 마르크스주의 확산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중국 혁명의 주체는 농민” 가능성을 일찍이 제시하여 마오쩌둥의 사상적인 멘토 역할을 수행했다. 반면, 초기 중국 공산당에는 러시아 모델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천두슈(陈独秀, Chen Duxiu)로, 신문화운동의 중심 인물이자 《신청년(新青年)》의 편집자였다. 그는 공산당의 초대 총서기로서 도시 노동자 중심 혁명을 주장하였으나, 후일 당내 투쟁에서 밀려나 축출되었다.
도시 중심 공산당 지도부는 농민운동의 “과격성”을 비판하였는데, 마오는 이에 반대하며, 혁명의 가장 강력한 힘은 농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1927년에 그가 발표한 아래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그들 맨 앞에서 행진하며 이끌 것인가? 아니면 그들 뒤에서 손짓하며 비판할 것인가? 혹은 그들과 맞서서 반대편에 서서 대적할 것인가? 혁명이란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일도, 에세이를 쓰는 일도,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자수를 놓는 일도 아니다. 혁명은 그렇게 정교하고, 한가롭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고상하고, 예의 바르고, 절제되고, 상냥한 것이 될 수 없다. 혁명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권력을 전복시키는 봉기, 즉 폭력을 수반한 행동이다.”
이를 통해 그는 명은 본질적으로 폭력적 충돌이며, 기존 질서(지주·엘리트 계층)의 해체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므로 혁명적 폭력(revolutionary violence)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공산당의 위기
상하이 대학살
중국공산당은 처음에는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1차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의 건설을 도왔으며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객군 반란 진압, 국민당의 2차 동정과 남정에 적극 참여하여 대중운동을 선동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공산당을 선전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수립된 이후 1922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은 국민혁명을 위한 통일 전선을 형성했다. 제1차 국공합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관계는 설립 때부터 불안했고 쑨원 사후 폭발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노동자 조직·혁명 운동을 강화하는 것을 보며 공산당을 국민당의 적대 세력으로 판단하였고,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 진입한 뒤 노동자 파업조직, 공산당 지부, 좌익 단체를 전격적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이로 인해 수천~수만 명의 공산주의자와 노동자가 체포, 고문, 처형되었고, 6만에 달하던 당원은 1만명으로 급감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이를 계기로 농촌으로 도피하게 되었다.
대장정
중국 공산당이 상하이 대학살을 통해 위기에 몰린 이후, 중국공산당은 천두슈의 지휘 아래에 난창 폭동 등을 감행하면서 노동자들의 힘을 빌어 소비에트를 건설하려 했지만 국민당에게 번번이 진압될 따름이었다. 이후로도 무모한 무장봉기가 실패하자 공산당은 지하활동과 지방 소비에트 건설에 주력했다. 이때 두각을 드러낸 것이 정강산에서 시작하여 장시성(江西省) 전체에 이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지구를 확보한 마오쩌둥과 주더였다.
1929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당원들과 함께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장시성, 푸젠성 일대에 혁명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이후 1931년 11월에 장시성(江西省)에서 중화 소비에트 전국 대회가 열리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당중앙에서 지시하는 폭동이 무모한 것이니 실패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비정통 혁명 이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당중앙이 내세우던 연속혁명론, 무장봉기론은 계속 실패했지만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지구는 날이 갈수록 확장되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장시성 소비에트는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기에 이르렀으며, 1931년 11월에는 인구 250만 명의 장시성 루이진(瑞金) 지역에서 정부 주석 마오쩌둥, 부주석 장궈타오, 군사위원회 주석 주더를 선출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 정부 성립을 선언하였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에서는 자체적인 화폐를 발행할 정도로 소규모 혁명국가처럼 기능하였으며, 토지개혁 실험, 농민 동원, 간부 교육 등 마오주의 정책의 초기 실험장이 되었다.
국민정부는 이런 소비에트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공산당의 홍군을 처음에는 단순히 비적떼로 얕잡아보아 지방군을 중심으로 한 보잘것없는 공세를 초기에 취했으며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공산당 스파이들이 정보를 빼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모셔온 한스 폰 젝트를 위시한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으로 섣불리 진군하는 것을 자제하고 요처마다 콘크리트 진지를 건설하며 중국공산당의 숨통을 조여갔다. 이에 따라 홍군은 그야말로 쓰러져갔고 공산당은 공격은커녕 근거지도 지킬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공산당 수뇌부는 현재의 근거지를 고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Figure는 당시 홍군 약 8만 명이 국민당의 포위망을 뚫고 서북부로 9,000km 이상 도보로 이동한 경로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대장정이라고 불리며, 이는 전술적으로는 병력의 90%를 잃어버린 기나긴 퇴각과 도주의 과정이었다. 또한 간신히 피신한 서북 지역도 중국 본토에서 가장 척박하고 인구밀도도 희박한 곳 중 하나로서 도저히 장기적으로 혁명을 도모할 만한 곳이 되지 못하여 공산당 내부에서는 외몽골이나 신장으로 이동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대장정은 중국공산당의 승리였다. 어쨌든 중국 국민당은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박멸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며, 홍군의 핵심 지도부는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그의 정치/군사 이론을 중심으로 한 지도 체계의 그 유효성을 입증하며 중국 공산당 내에서의 주도권을 더욱 틀어쥘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이를 바탕으로 북쪽에서 다시금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옌안 소비에트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을 피해서 정착한 곳은 산간닝변구(陕甘宁边区)라는 곳이었다. 산간닝변구라는 이름은 산시성, 간쑤성, 닝샤성의 앞 글자를 따서 명명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국민정부 내에 존재했던 제2차 국공합작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 공산당이 얻은 합법적인 통치 영역이었고, 혁명수도 옌안이 위치했다.
이 지역에서 마오쩌둥은 옌안 소비에트를 건국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명 간부와 농민이 함께 생활하며 교육·정치 동원·사상 개조가 진행되었다. 또한 내부 정풍(整風, Rectification Movement)을 통해 모든 간부가 마오의 사상에 충성하도록 재교육이 진행되었으며, 이 시기에 “마오쩌둥 사상(Mao Zedong Thought)”이 공산당의 공식 지도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마오쩌둥 사상은 아래와 같다:
- 군사투쟁과 정치투쟁의 통합: 혁명은 단순한 군사행동이 아니라 정치·사회·사상 영역 전체를 동원하는 총체적 전쟁
- 일상의 변혁: 혁명은 정치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방식, 사고방식, 관습까지 변화시켜야 한다.[1]
- 대중 속에서의 혁명 의식 고취: 혁명은 간부가 아니라 ‘인민’이 수행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 군중노선: 간부는 대중 속에 들어가 민중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혁명적 형태로 재구성하여 다시 대중에게 환원해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제2차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은 산간닝 변구를 기반으로 점차 공산당 근거지인 해방구를 늘려갔다. 1945년 일본 제국은 패망하고 잠깐 동안은 공산당과 국민정부는 화평교섭회담을 개최하는 등 외견상의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실제로는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 싸움을 준비하던 상황이었고 그 사이 홍군은 소련의 군정 치하에 있는 만주에서 소련의 도움으로 관동군의 무기로 무장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결국 장제스는 1946년 6월 국공합작을 깨고 소비에트 지구를 침공하면서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국민혁명군이 우세했으나, 1947년 하반기부터 밀리기 시작하였다. 1948년에는 홍군을 중국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에는 공산당은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국민정부는 대만으로 피신한다. 이후 공산당은 중국을 수립하였다.
토지개혁과 집단 농촌화
1949년 건국 직후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초기 정책은 지주·부농 계급 제거였으며, 이를 위해 토지를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여 공산당의 농촌 지배력을 강화하는 토지개혁이 진행되었다. Figure는 당시 시기의 전형적인 자아비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지 중앙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지주로, 중국공산당과 당시 농민들에게 악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토지개혁이 단순한 정책 집행이 아니라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혁명적 의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 계층이 완전히 소멸하고, 농업 정책의 방향은 대규모 집단농장의 형태로 빠르게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비난하며 더 빠르고 더 급진적인 집단화를 요구하였다. 아래는 그의 주장을 담은 글이다:
“새로운 사회주의 대중운동의 거대한 물결이 곧 전국 농촌 지역을 휩쓸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몇몇 동지들은 마치 전족(纏足)한 여인처럼 비틀거리며, 늘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너무 빨리 간다, 너무 빨리 간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사소한 흠을 트집 잡고, 근거 없는 불평을 하고, 끝없는 걱정과 수많은 금기만 만들어내며, 이런 태도가 농촌 사회주의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올바른 방침이라고 여긴다. 아니다... 이것은 잘못된 방침이다.”
마오쩌둥은 위와 같은 말을 통해서 신중론, 점진주의는 모두 반혁명적 보수성에 해당하며, 대중은 혁명적 열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도층은 대중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집단화를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대약진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반우파 운동
1956년,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의 자유발언을 허용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4월 2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아래는 1956년 5월 26일,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여러 지식인 2천여 명을 모아놓고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대해 강연한 내용의 일부이다:
"독립적인 사고와 자유로운 토론이 장려되지 않는다면 학술발전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준다. 문학예술활동과 과학연구에 있어서 독립적인 사고의 자유, 논쟁의 자유, 창작과 비평의 자유, 자기의 의견을 발표, 견지, 유보할 수 있는 제유를 제창한다."
물론 우호적 비판은 허용하되 '비난'은 철저히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지식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지식인들은 그동안의 사상개조운동의 영향으로 폐쇄된 언로와 중국공산당의 독주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은근히 개방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산당에게 호되게 시달려왔던 지식인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마오쩌둥의 뜻에 따라 공산당 내부의 문제에 대한 정풍운동을 1957년 4월 25일부터 전개하고 모든 '우호적' 비판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거듭 표명하면서 지식인들은 점차 용기를 얻었다. 아래는 중공중앙통일전선부가 1957년에 주최한 좌담회에서 좌담회를 주최한 리웨이한이 말한 내용이다:
"이 회의를 소집한 목적은 여러분에게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정풍을 원조해달라는 것과 우리의 결점과 잘못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통일전선의 방법을 가지고 우리의 정풍을 추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서 여러분이 자세한 비판과 의견을 많이 제시해 줄 것을 희망한다."
이렇듯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대놓고 '마음껏 떠들어도 좋다'. '절대로 계급투쟁을 하지 않겠다.'라고 부추기자, 지식인들은 마침내 가슴속에 품어왔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는 공산당원의 특권인식과 공산당의 무능, 공산당의 법과 제도를 운용할 능력의 부재, 공산당의 독주 비판 등 중국 사회 전체와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이 진행한 여러 전반적인 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백화제방', '백가쟁명' 방침을 정하고 지식인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를 제공한 후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허용할 수 없는 범위의 비판을 넘어서 공산당의 통치 전반에 걸쳐 비판 및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 대학생들은 더 나아가 "공산당을 탈퇴하고 자유시민이 되자", "마오쩌둥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에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에게 철퇴를 가하기로 결심했다. 아래는 1957년 7월 1일, 인민일보에 개재된 사설의 일부이다:
중국민주동맹이 백가쟁명과 정풍 과정에서 행한 역할은 매우 열악하며 그들의 조직, 계획, 강령, 노선은 모두 인민을 도외시하는 것이며, 반공반사회주의이자 반공 반민주의이다. 그리고 농공민주당도 똑같다. (중략) 중국의 하늘은 흑구름으로 뒤덮였고, 이것의 출처는 장보쥔, 뤄룽지, 장즈중 동맹이다. 그들은 죄가 있으며, '말하는 사람은 무죄다'라는 원칙이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백화제방에서 정부를 비판한 사람들은 곧 ‘우파분자(Rightists)’로 규정되어 숙청 대상이 되어 약 55만 명이 숙청, 재교육, 노동교화로 끌려갔다. 이로 인하여 교육·관료·지식인 계층이 큰 타격을 입었고, 중국에서 정치적인 비판의 공간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마오가 처음부터 비판자를 드러내기 위해 유도했다는 견해와, 진심으로 비판을 허용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판이 쏟아지자 공산당이 공포심을 느껴 탄압으로 선회했다는 두 가지의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공통된 결과는 정치적 자유는 짧게 열렸다가 더욱 강하게 폐쇄되었다는 것이다.
대약진운동
각주
- ↑ 이는 이후 문화대혁명(1966-76)의 이념적 준비 단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