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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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의 지배를 인정했지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 Little China)로 인식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진정한 유교 문명의 계승자라고 여겼고, 청을 야만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명(明)에 대한 충성심(Ming royalism)은 조선에서 강하게 남아 있었고, 청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은 ‘화이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자신이 문명의 중심(Confucian orthodoxy)임을 스스로 주장하며 정신적 중심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은 청의 지배를 인정했지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 Little China)로 인식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진정한 유교 문명의 계승자라고 여겼고, 청을 야만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명(明)에 대한 충성심(Ming royalism)은 조선에서 강하게 남아 있었고, 청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은 ‘화이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자신이 문명의 중심(Confucian orthodoxy)임을 스스로 주장하며 정신적 중심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Figure 명 황제에게 감사와 충성을 표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세워진 창덕궁 대보단이다. 이는 조선이 청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명을 섬겼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조선은 스스로의 도덕적 정통성을 재확인하려는 상징적 행동이기도 하다.
Figure 5는 명 황제에게 감사와 충성을 표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세워진 창덕궁 대보단이다. 이는 조선이 청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명을 섬겼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조선은 스스로의 도덕적 정통성을 재확인하려는 상징적 행동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에서는 1659년, 효종(孝宗) 시기에 북벌(北伐, Northern Expedition) 논의가 있었다. 이는 명을 멸망시킨 청에게 복수하고, 중화 문명을 되찾자는 상징적 계획이었다. 이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명에 대한 의리와 유교적 도덕을 지키려는 정신적 선언이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1659년, 효종(孝宗) 시기에 북벌(北伐, Northern Expedition) 논의가 있었다. 이는 명을 멸망시킨 청에게 복수하고, 중화 문명을 되찾자는 상징적 계획이었다. 이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명에 대한 의리와 유교적 도덕을 지키려는 정신적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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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단순히 ‘중국화’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민족 제국을 통치했다. 예를 들면 만주족의 전통적인 머리 모양인 변발을 계속 사용한 것이 있다. 또한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을 함께 사용하는 다언어 행정 체계를 운영하여, 화와 이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시대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단순히 ‘중국화’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민족 제국을 통치했다. 예를 들면 만주족의 전통적인 머리 모양인 변발을 계속 사용한 것이 있다. 또한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을 함께 사용하는 다언어 행정 체계를 운영하여, 화와 이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시대를 만들었다.
==청나라의 다민족 통치==
명나라는 그 세력이 한족 중심의 중국 본토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에 반해, 청나라는 그 자체로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위구르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거대하는 다민족 제국이었다. 이 때문에 청나라가 중앙 행정 체계가 명나라에서 계승되었음에도, 내륙 아시아 통치에는 별도의 기구를 두었다. 이범원(理藩院, The Lifanyuan)은 청 제국의 내륙 통치를 담당한 핵심 기관으로, 주로 티베트, 몽골, 신장 등의 비(非)한족 지역의 외교·행정·종교 문제를 담당했다. 또한 이범원은 티베트 불교의 사원·승려·환생 제도 등을 직접 감독하고, 황제의 후원 관계를 제도화했다.
==청나라와 불교==
[[파일:Figure 6. 강희제 시기 불교 경전.png|섬네일|250x250픽셀|Figure 6. 강희제 시기 불교 경전]]
명나라는 그 세력이 한족 중심의 중국 본토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에 반해, 청나라는 그 자체로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위구르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거대하는 다민족 제국이었다. 청은 이러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 불교를 활용하였다. Figure 6은 1667년 강희제(康熙帝) 시기의 불교 경전 제작을 보여준다. 이는 화려한 금박 문자(gold ink)와 불교 도상(佛像)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청 제국이 불교 신앙을 제국의 권위와 연결시킨 상징물이다. 또한 황제는 단순히 “중국(한족)”의 군주가 아니라, 만주족·몽골족·티베트족·위구르족 모두의 “보살적 군주”로서 자신을 정당화했다.
[[파일:Figure 7. 준가르 지역 정벌 그림.png|섬네일|250x250픽셀|Figure 7. 준가르 지역 정벌 그림]]
또한 청나라는 정복 과정, 혹은 정복된 지역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불교를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figure 에 나타난 그림은 청나라의 황제가 준가르 지역을 정벌한 것을 묘사한다. 청나라 시대의 정복 전쟁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한 정전(正戰)”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군사적 통치를 종교적 공덕 행위로 연결지은 것이다.<br>
청나라가 티베트를 통치할 때 라싸(Lhasa)에 공을 들인 것 역시 맥락을 같이한다. 라싸는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라싸를 통제한다면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전체 불교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청의 티베트 통치는 단일 도시(라싸) 중심이 아니라, 광범위한 고원 전체의 불교·행정적 네트워크 통제를 목표로 한 것이다.
===환생 제도===
청나라의 불교를 이용한 통치는 원나라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원(元) 제국 시기, 쿠빌라이 칸이 티베트의 불교 지도자 파그파(Phagpa)를 후원하여 시주자-수도승 관계(Patron–Priest Relation)를 수립한 것이 있다. 이후에도 불교 지도자들은 환생 제도(轉生制度)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권위를 유지하였는데, 대표적으로 3대 까마빠(Karmapa)<ref>티베트 불교 '까규파(Karma Kagyu School)'의 최고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ref>인 랑중 도르제(Rangjung Dorje, 1284–1339)는 명 왕조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즉, 청나라의 불교 활용은 그 연장선상에 서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여서, 까르마파(Karmapa)와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환생하는 지도자로서 그 권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겔룩파의 부흥===
[[파일:Figure 8. 청나라 황제와 달라이 라마.png|섬네일|250x250픽셀|Figure 8. 청나라 황제와 달라이 라마]]
겔룩파는 15세기 초 종창파(Tsongkhapa)에 의해 창시된 티베트 불교의 개혁 종파로, 계율과 학문을 중시했다. 이 종파는 달라이 라마(Dalai Lama) 제도를 제도화하며 티베트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이 되었다. Figure 8는 청나라 황제와 달라이 라마의 회견 장면을 묘사하는데, 티베트 불교 고승과 청 황제 간의 시주자–수도승 관계를 상징한다. 해당 관계는 황제는 불법(佛法)을 보호하고, 승려는 황제에게 영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호혜적인 관계였다. 이를 통해서 청 황제는 불교 고승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초월적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파일:Figure 9. 포탈라 궁.png|섬네일|250x250픽셀|Figure 9. 포탈라 궁]]
Figure 9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위치한 포탈라 궁으로, 17세기 중엽 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세워져 티베트 불교의 정치·종교적 수도 역할을 했다. 포탈라궁은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자 행정 중심지였다. 포탈라 궁은 중국 열하에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의 모델이 되었는데, 푸투종승사는 건륭제가 직접 명령하여 1767년에 건축한 사원으로, 포탈라궁을 거의 그대로 복제한 사원이다. 이는 제국 내 불교적 통합을 상징하며, 황제는 이 사원을 티베트·몽골 사절단을 맞이할 때 사용했다.
그 결과, 19세기 몽골 인구의 30~60%가 승려로 생활할 정도로 불교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건륭제 시대에는 2,000여 개의 사원이 존재했으며, 티베트 경전 230종이 몽골어로 번역되었다. 이때 티베트 대장경(Tripitaka)은 몽골어·만주어로도 번역되어, 불교가 제국 공용 문화로 확산되었다.


==각주==
==각주==

2025년 10월 29일 (수) 19:09 판

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Figure 1. 청나라 지도
Figure 2. 누르하치

해당 문서에서는 명(明, Ming)나라가 어떻게 형성되고,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한다.

역사

후금의 건국

Figure 3.  청나라 황실 의복

여진족은 본래 통일된 민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명의 통제력 약화와 무역 제재로 여진 사회 내부에 경제·군사적 긴장이 축적되었고, 이 상황을 틈타 누르하치(ᠨᡠᡵᡤᠠᠴᡳ, Nurhaci)는 만주의 여진족들 사이의 혼인, 외교, 전쟁을 통해 점진적으로 통합에 성공하여 후금(後金, Late Jin)을 건국하였다. 이때, ‘여진 부족 통합’은 단순한 부족 연맹에서 그치지 않고 군사·행정 조직인 팔기제(八旗制, Eight Banners)의 창설로 이어졌다. 또한 누르하치는 몽골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고, 조선과도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사르후 전투(Battle of Sarhū, 1619)는 만주 지역 여진족의 독립과 통일을 확정지은 전투이다. 사르후 전투는 조선, 명나라, 예허 여진족 연합과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해당 전투는 후금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후금은 예허 여진족 까지 정복하여 여진족의 통합이 완성되게 된다. 또한 명나라는 이 시점부터 방어적으로 태세를 전환하였으며, 조선은 명의 요청으로 참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이후 후금과의 관계 재정립을 한다. 이 승리 이후 누르하치는 자신을 ‘천명(天命)을 받은 자’로 인식하며 제국 건설을 추진했다.

청나라의 건국과 조선 정벌

홍타이지(ᡥᠣᠩ ᡨᠠᡳᠵᡳ, Hong Taiji)는 누르하치의 아들로, 후금의 제2대 황제이다. 홍타이지는 1636년 ‘청(淸, Qing)’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여 청 왕조의 실질적 창시자로 불린다. 또한 그는 1635년에는 몽골을 정복하였으며, 조선을 두차례 침공하여 1636년 조선을 청의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이를 계기로 왕자들과 귀족 자제들을 심양(Shenyang)에 인질로 보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비를 설치하였다. 또한 조선은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의 대명 전쟁에 합류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외교 관계 변화가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의 근본적 재편, 즉 명 중심의 화이(華夷, Hua–Yi) 질서가 무너지고, 만주 중심의 새로운 질서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홍타이지는 몽골정복을 불교적 정당성(티베트 불교와의 연계)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청 왕조는 불교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신성한 제국’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는 Figure 에서 보이는 청 황후의 초상에서 염주에서 따온 구슬 장신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진(Jurchen)”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만주(Manchu)”로 대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문수보살(Manjushri, 지혜의 상징)와 만주를 연결하여, 황제가 그 화신이라는 불교적 상징정치를 활용했다.

중원 통일과 남하

당시 명나라는 흉년과 기근, 전염병, 자연재해, 은 유통의 불안정 등으로 인한 재정 위기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또한 만력제의 태업과, 임진왜란에 대한 무리한 항왜 지원 등으로 인해 국력이 빠르게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내부적으로는 농민 반란으로 인해, 외부적으로는 누르하치에 의한 만주 통합으로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특히 명나라의 숨통을 거의 끊은 사건으로는 이자성(李自成, Li Zicheng)의 난이 있다. 이자성은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로, 스스로를 “창왕(闖王, Dashing King)”이라 칭하였는데 1644년 북경(자금성)을 점령하며 명 왕조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못하고 잠시 권력의 공백을 메웠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청에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을 제공하여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으로 진입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이자성의 반란은 명의 몰락을 앞당기고, 청의 중국 본토 진입 통로를 열어준 셈이다.

명나라의 멸망 후, 남중국에는 Fuzhou, Guangzhou, Anlong 등의 남명 정권들이 들어선다. 여러 명의 황족이 지역별로 “복명(復明)”을 시도했으나 서로 통합하지 못하였고, 결국 청나라에게 차근차근 격파되며 실패하게 된다.

청나라는 명 잔존세력을 제압한 후, 남부 통치 강화를 위해 세 명의 한족 장군에게 봉왕(藩王) 작위를 부여하였으며, 이를 삼번정책(三藩制度, The Three Feudatories)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오삼계(吳三桂, Wu Sangui)로 그는 본래 산해관(Shanhaiguan,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을 수비하던 명나라 장군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숭정제가 사망하자, 청군과 손잡고 북경의 이자성 반군을 공격하여 청군의 중국 진입을 허용하였다. 이후 청으로부터 번왕(藩王)의 작위를 받고 남부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청나라는 상가희(광동 지방)와 경중명(복건 지방)에게 번왕의 칭호와, 사실상의 자치권을 주었다. 이는 초기 청 왕조의 중국 대륙에 대한 통치가 아직 중앙집권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이 점점 군벌로서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강희제(康熙帝)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의 봉지를 회수하려고 했지만, 세 번왕이 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해당 반란은 진압되었고, 청나라는 이를 통해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과, 중국 전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게 된다.

Figure 4. 청의 남하 경로

Figure 는 1645–1683년 사이 청이 남중국 지역을 점령해 나가는 경로를 보여준다. 청은 1644년 북경 점령 이후 점차 남하하며, 저지방(江南)과 남부 광동·복건·운남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청 제국의 확장은 단순한 군사 정복이 아니라, ‘명 잔존 세력(Southern Ming)’을 제압하고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즉, 청의 남하란 ‘중국화(Sinicization)’의 시작이자, 북방 제국이 중국문명권 중심으로 진입하는 사건이다.

명나라의 마지막 잔존 세력은 동녕국(東寧國, Kingdom of Tungning)으로, 1662년에 대만에서 건국되었다. 동녕국은 명의 충신인 정성공(鄭成功, Zheng Chenggong)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로, 네덜란드 식민 세력을 몰아내고 세워졌다. 동녕국의 명목적인 왕은 녕경왕(Prince of Ningjing)이었으며, 실권은 정성공에게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1683년, 청의 해군 장군 시랑(施琅, Shi Lang)에게 정벌당해 멸망되었다. 이는 타이완이 중국 영토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준가르 지역 정벌

준가르(Dzungar)족은 몽골계 오이라트(Oirat) 부족의 후예로, 청 제국 북서쪽 경계 지역(지금의 신장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세력이다. 청나라 초기에는 이들과 외교적 협력과 긴장이 반복되었지만, 점차 청의 영토 확장과 종교(티베트 불교) 영향력 경쟁이 심화되면서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로 인해서 청나라는 1687년부터 1757년까지, 강희제(Kangxi Emperor), 옹정제(Yongzheng Emperor), 건륭제(Qianlong Emperor) 세 황제가 차례로 준가르 세력을 공격하였다.

특히 건륭제 시기에 청군은 대규모 원정을 통해 준가르를 완전히 멸망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청은 준가르 인구의 대다수를 살해하거나 이주시켜 준가르 멸족(準噶爾滅族)이라고 불릴 정도의 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서 청 제국은 신장(Xinjiang)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청은 정복 이후 군정(군사 통치)과 이민 정책을 실시하여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등을 이 지역에 이주시켰으며, 준가르 지역은 이후 “서쪽 변경의 안정”을 상징하는 제국 확장의 완성으로 여겨졌다. 또한 청은 이후 티베트 불교의 고승(특히 달라이 라마)을 제국 체계에 포섭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 대한 관리 체계를 강화했다. 이는 청 제국이 단순한 한족 중심 왕조가 아니라, 다민족 제국으로서 유라시아적 통합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와 세계 질서의 재편

청나라 등장 이전에는 화이 사상(華夷之辨, Hua–Yi Distinction), 즉 문명(華)과 야만(夷)을 구분하는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이 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청나라의 등장은 ‘비(非)중화인’인 만주족이 중화 제국을 지배하는 상황을 통해 해당 세계관을 붕괴시켰다. 해당 문단에서는 동아시아의 각 국가가 어떻게 붕괴된 세계 질서를 받아들였는지를 설명한다.

조선

Figure 5. 창덕궁 대보단

조선은 청의 지배를 인정했지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 Little China)로 인식하였다. 조선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진정한 유교 문명의 계승자라고 여겼고, 청을 야만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명(明)에 대한 충성심(Ming royalism)은 조선에서 강하게 남아 있었고, 청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은 ‘화이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자신이 문명의 중심(Confucian orthodoxy)임을 스스로 주장하며 정신적 중심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Figure 5는 명 황제에게 감사와 충성을 표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세워진 창덕궁 대보단이다. 이는 조선이 청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명을 섬겼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조선은 스스로의 도덕적 정통성을 재확인하려는 상징적 행동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에서는 1659년, 효종(孝宗) 시기에 북벌(北伐, Northern Expedition) 논의가 있었다. 이는 명을 멸망시킨 청에게 복수하고, 중화 문명을 되찾자는 상징적 계획이었다. 이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명에 대한 의리와 유교적 도덕을 지키려는 정신적 선언이었다.

일본

일본 역시 중국의 화이사상(華夷變態, Ka-I hentai) 개념을 차용하여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일본은 스스로를 문명(Ka, 華)으로, 주변 아시아를 야만(I, 夷)으로 보는 시각을 가졌다. Ka-I hentai는 “화이의 변화된 형태”라는 뜻으로, 청의 지배 이후 중국의 중심성이 약화되자 일본은 자신이 새로운 ‘중화 문명’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다.

청나라

옹정제(Yongzheng Emperor) 시기에 편찬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은 청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한족 학자들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이다. 옹정제는 “만주는 야만이 아니라, 덕과 문명을 갖춘 새로운 통치자”임을 주장했다. 이는 청 제국이 ‘화이 구별’을 의도적으로 해체하려 했음을 보여주며, “만주족과 한족은 한 가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정당성을 정통 중국 왕조와 동등하게 만들려 했다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단순히 ‘중국화’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민족 제국을 통치했다. 예를 들면 만주족의 전통적인 머리 모양인 변발을 계속 사용한 것이 있다. 또한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을 함께 사용하는 다언어 행정 체계를 운영하여, 화와 이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시대를 만들었다.

청나라의 다민족 통치

명나라는 그 세력이 한족 중심의 중국 본토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에 반해, 청나라는 그 자체로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위구르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거대하는 다민족 제국이었다. 이 때문에 청나라가 중앙 행정 체계가 명나라에서 계승되었음에도, 내륙 아시아 통치에는 별도의 기구를 두었다. 이범원(理藩院, The Lifanyuan)은 청 제국의 내륙 통치를 담당한 핵심 기관으로, 주로 티베트, 몽골, 신장 등의 비(非)한족 지역의 외교·행정·종교 문제를 담당했다. 또한 이범원은 티베트 불교의 사원·승려·환생 제도 등을 직접 감독하고, 황제의 후원 관계를 제도화했다.

청나라와 불교

Figure 6. 강희제 시기 불교 경전

명나라는 그 세력이 한족 중심의 중국 본토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에 반해, 청나라는 그 자체로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위구르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거대하는 다민족 제국이었다. 청은 이러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 불교를 활용하였다. Figure 6은 1667년 강희제(康熙帝) 시기의 불교 경전 제작을 보여준다. 이는 화려한 금박 문자(gold ink)와 불교 도상(佛像)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청 제국이 불교 신앙을 제국의 권위와 연결시킨 상징물이다. 또한 황제는 단순히 “중국(한족)”의 군주가 아니라, 만주족·몽골족·티베트족·위구르족 모두의 “보살적 군주”로서 자신을 정당화했다.

Figure 7. 준가르 지역 정벌 그림

또한 청나라는 정복 과정, 혹은 정복된 지역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불교를 활용하였다. 예를 들어 figure 에 나타난 그림은 청나라의 황제가 준가르 지역을 정벌한 것을 묘사한다. 청나라 시대의 정복 전쟁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한 정전(正戰)”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군사적 통치를 종교적 공덕 행위로 연결지은 것이다.
청나라가 티베트를 통치할 때 라싸(Lhasa)에 공을 들인 것 역시 맥락을 같이한다. 라싸는 티베트 불교의 종교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라싸를 통제한다면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전체 불교 네트워크를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청의 티베트 통치는 단일 도시(라싸) 중심이 아니라, 광범위한 고원 전체의 불교·행정적 네트워크 통제를 목표로 한 것이다.

환생 제도

청나라의 불교를 이용한 통치는 원나라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원(元) 제국 시기, 쿠빌라이 칸이 티베트의 불교 지도자 파그파(Phagpa)를 후원하여 시주자-수도승 관계(Patron–Priest Relation)를 수립한 것이 있다. 이후에도 불교 지도자들은 환생 제도(轉生制度)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권위를 유지하였는데, 대표적으로 3대 까마빠(Karmapa)[1]인 랑중 도르제(Rangjung Dorje, 1284–1339)는 명 왕조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즉, 청나라의 불교 활용은 그 연장선상에 서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여서, 까르마파(Karmapa)와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환생하는 지도자로서 그 권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겔룩파의 부흥

Figure 8. 청나라 황제와 달라이 라마

겔룩파는 15세기 초 종창파(Tsongkhapa)에 의해 창시된 티베트 불교의 개혁 종파로, 계율과 학문을 중시했다. 이 종파는 달라이 라마(Dalai Lama) 제도를 제도화하며 티베트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이 되었다. Figure 8는 청나라 황제와 달라이 라마의 회견 장면을 묘사하는데, 티베트 불교 고승과 청 황제 간의 시주자–수도승 관계를 상징한다. 해당 관계는 황제는 불법(佛法)을 보호하고, 승려는 황제에게 영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호혜적인 관계였다. 이를 통해서 청 황제는 불교 고승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초월적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Figure 9. 포탈라 궁

Figure 9는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위치한 포탈라 궁으로, 17세기 중엽 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세워져 티베트 불교의 정치·종교적 수도 역할을 했다. 포탈라궁은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의 거처이자 행정 중심지였다. 포탈라 궁은 중국 열하에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의 모델이 되었는데, 푸투종승사는 건륭제가 직접 명령하여 1767년에 건축한 사원으로, 포탈라궁을 거의 그대로 복제한 사원이다. 이는 제국 내 불교적 통합을 상징하며, 황제는 이 사원을 티베트·몽골 사절단을 맞이할 때 사용했다.

그 결과, 19세기 몽골 인구의 30~60%가 승려로 생활할 정도로 불교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건륭제 시대에는 2,000여 개의 사원이 존재했으며, 티베트 경전 230종이 몽골어로 번역되었다. 이때 티베트 대장경(Tripitaka)은 몽골어·만주어로도 번역되어, 불교가 제국 공용 문화로 확산되었다.

각주

  1. 티베트 불교 '까규파(Karma Kagyu School)'의 최고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