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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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당(唐)나라는 수나라의 뒤를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 |||
==당나라의 건국== | |||
[[파일:Figure 1. 당 고조의 어진.png|섬네일|Figure 1. 당 고조의 어진]] | |||
당나라는 이연(李淵)에 의해 618년에 건국되었으며, 그 해에 이연은 고조(高祖)로 즉위하였다. 당나라는 수도를 장안(長安, Chang’an)으로 삼았으며, 수나라의 대부분의 전통과 제도를 이어받았다. 동시에 더 오래된 한나라/주나라의 전통을 받아들여 새로운 전통 왕조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 |||
===당나라의 초기 안정=== | |||
당나라는 후기 수나라의 많은 반란과 군벌들 중의 하나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여러 군벌과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한 수나라의 제도를 계승하되, 지나친 강압 대신 실용적이고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 |||
또한 당 고조는 황제 자신을 "도덕적이고 하늘의 인정을 받은 통치자"로 강조하여 백성과 귀족의 지지를 끌었다. 이는 천명(天命) 사상과 연계된 것으로, 수나라의 과도한 전쟁과 토목 공사가 천명을 잃게 했다고 비판하였다. 반면 자신들은 덕치(德治, 도덕적 통치)로 천명을 회복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천명사상은 당나라의 법률인 당률에 잘 나타나 있다: | |||
『공양전(公羊傳)』에 이르기를, “군주나 부모는 모반을 꾀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라 하였다. 이는 곧 군주나 아버지를 해칠 반역의 마음을 품는 자가 있으면, 그들을 반드시 죽여야 함을 뜻한다. 『좌전(左傳)』에는 “하늘의 시기가 거꾸로 되면 재앙이 있고, 사람의 덕이 거꾸로 되면 난리가 있다”라고 하였다.<br> | |||
임금은 가장 존귀한 자리에 있으며 하늘의 귀한 명(命)을 받는다. 하늘과 땅처럼 백성을 덮어주고 떠받쳐 주므로, 곧 백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그 자식이자 신하들은 마땅히 충성과 효도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사악한 마음을 품고 반역의 뜻을 가지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하늘의 불변하는 이치에 거스르고 인륜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모반(謀反)이라 한다. | |||
이는 왕은 천명을 받은 존재이므로, 반역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천지의 질서를 거스르는 죄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당률은 단순한 법이 아니라 도덕적·우주론적 질서를 반영한 규범 체계라는 것을 보여주며, 정치적 반역은 곧 우주의 조화를 깨뜨리는 중범죄로 규정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 |||
==당나라 사회== | |||
===당나라의 수도, 장안=== | |||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격자형(grid) 구조로 설계된 대규모 수도이다. 장안은 당나라의 상업, 문화, 외교가 집중되고 발전한 도시임은 물론 세계 도시적 성격을 지녔다. 이는 외국의 사신과 상인, 불교 승려들이 당나라와의 교류와 교역을 위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더욱 발전 시켜서 외부 세계와 중국 대륙과의 연결을 더욱 긴밀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였다. | |||
===당나라의 법과 제도=== | |||
당률(唐律, Tang Legal Code)는 법가(法家)의 엄격한 법을 적용함은 물론, 유교적인 도덕 규범을 결합하였다. 이를 통해서 단순히 처벌이 아니라 윤리적 교화를 함께 강조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전체(한국, 일본, 베트남)의 법체계 모델이 되었으며, 법과 도덕의 균형이라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 |||
당은 수나라의 제도와 성과를 계승하고자 했다. 수의 관료제, 법전, 균전제를 계승한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무리한 대규모 토목사업, 과중한 세금, 무리한 대외 원정은 피하며, 성공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 |||
===당나라의 종교=== | |||
[[파일:Figure 2. 어린 석가모니를 노자에게 건네는 공자 그림.png|섬네일|293x293픽셀|Figure 2. 어린 석가모니를 노자에게 건네는 공자 그림]] | |||
당나라는 도교, 불교, 유교를 모두 받아들여, 다양한 종교/사상이 공존하였다: | |||
* 도교(道敎, Daoism): [[제자백가#도가(道家)|도가]]에서 발전한 민간 사상이다. 황제를 도교적 이상과 연결하여 정통성과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 |||
* 불교(佛敎, Buddhism): 불교는 국가의 지원 아래 크게 번성하였으며, 대규모 불교 사찰과 불상이 건립되었다. 또한 불교는 특유의 보편적인 원리와 세계관을 통해서 우주론과 보편적 권위를 제공하는데 사용되었다. | |||
* [[유교|유교(儒敎, Confucian)]]: 유교는 여전히 교육과 정치의 기본 틀로 여전히 존속하였으며, 인재 등용에 반영되었다. 이는 유교가 강조하는 도덕적인 정치와 충효에 기반한 것이다. | |||
이는 유불선이 동시에 공존한 당나라의 포용성과 문화적인 풍요를 보여주며, 당나라가 유불선의 요소를 동시에 활용하여 통치이념을 구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
===경제 개혁=== | |||
중국 역사에서 토지 분배는 국가의 안정과 직결되었다. 이는 귀족이나 대지주가 토지를 독점하면,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유민(流民)이 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나라는 백성들이 최소한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 |||
이를 위해 당나라는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제도인 균전제(均田制, Equal-field system)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농민의 안정은 물론 귀족의 토지 독점을 완화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함께 거둘 수 있었다. 이는 당나라의 재정과 군사 제도의 기초 역할을 했다. 특히, 균전제는 부병제(府兵制)와 연결되어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해야 했고, 이는 당의 군사력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 |||
===문화적 개방=== | |||
장안(長安)은 당나라의 수도이자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장안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심지어 비잔틴 제국과도 연결되어 다양한 사상과 예술이 유입되었다. 예를 들어 불교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승려들에 의해 번역되고 확산되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교, 기독교도 장안에 전해져 사원과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 |||
==당나라의 팽창== | |||
[[파일:Figure 3. 당나라가 영향력을 행사한 도호부 지도.png|섬네일|Figure 3. 당나라의 도호부 지도]] | |||
당나라는 초기 정복 전쟁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한반도 일부, 베트남 북부까지 영향력 확대하였음은 물론,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발전시켜서 경제적 이익과 문화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팽창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당나라를 "강대국"으로 인정받게 하였으며, 일본과 신라는 물론 서역의 국가들까지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었다. Figure 3는 당나라의 도호부(都護府, Protectorates) 지도이다. 도호부란 변방(특히 서역과 북방)을 통치·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행정 기관으로, 총독부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이는 당나라가 중원에서 거리가 먼 서원과 북방에도 그 영향력이 거대했음을 보여준다. | |||
===당나라의 군사 조직=== | |||
당나라는 초기에 부병제(府兵制, Fubing system)를 실행하였는데, 이는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군사 복무를 병행시키는 제도이다. 이는 군사와 농업을 균형있게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규군(professional armies)으로 대체되었다. | |||
===대외 관계=== | |||
수·당은 북방 유목민과 활발히 접촉했는데, 이는 당나라에게 중앙아시아는 중요한 교역로이자 군사적 충돌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민과의 평화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쟁·동맹·혼인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는데, 때로는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대치했고, 때로는 정권 안정을 위해 공주를 혼인 보내거나(화친정책), 선물과 조공을 교환했다. 이때 유목민들은 말을 비롯한 군사력과 교역품을 제공했고, 당나라는 비단, 곡식, 금속제 무기 등을 제공하면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 |||
또한 당나라는 조공(朝貢, tribute)체제를 발전시켰다. 조공체제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상징하는 제도로, 주변 국가나 부족들이 사절을 보내 “조공”을 바치면, 황제는 “은혜로운 하사품”을 돌려주는 방식이다. 당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동아시아 외교의 표준으로 삼았다. 이는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당이 세계 질서의 중심임을 과시하는 이념적 장치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역의 성격이 강했으며, 조공품보다 돌려주는 하사품이 훨씬 귀한 경우가 많아 주변국들이 경제적 이득을 얻는 수단이기도 했다. | |||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 교역로가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당은 서돌궐, 티베트 제국, 아랍 세력 등과 충돌하면서 군사·외교 경쟁을 벌였다. | |||
==당나라의 패권 경쟁== | |||
[[파일:Figure 4. 8세기 경 유라시아의 제국들.png|섬네일|Figure 4. 8세기 경 유라시아의 제국들]] | |||
당나라는 실크로드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으며, 실크로드의 안정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서역(중앙아시아)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는 다른 제국들과의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Figure 4는 8세기 경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 경쟁("Great Game")을 하던 제국들을 보여준다: | |||
* 아바스 왕조(Abbasids): 아바스 왕조는 중동 지방에서 팽창하던 강성한 이슬람 제국이다. | |||
* 토번 제국(Tibetans): 토번 제국은 오늘날의 티베트 지방에서 성장하여 당과 충돌한 제국이다. | |||
* 튀르크 세력(Turks): 튀르크 세력은 유목 제국으로, 북방 지역을 장악하였다. | |||
* 당 제국: 실크로드 동부와 중국 내 중심부 장악하였다. | |||
이들은 모두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서 시도하였으며, 이는 결국 당나라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 |||
===토번 제국=== | |||
[[파일:Figure 5. 토번 제국의 세력권.png|섬네일|Figure 5. 토번 제국의 세력권]] | |||
[[파일:Figure 6. 티베트 지역의 구분.png|섬네일|Figure 6. 티베트 지역의 구분]] | |||
토번 제국은 송찬간포(松贊干布, Songtsen)에 의해서 건국되어 중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송찬감포는 중국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와 혼인하여 당과의 외교적, 문화적 교류를 강화했으며, 불교를 티베트에 본격적으로 들여왔다. 이때 톤미 산보타(Thonmi Sam Bhota)는 인도에 파견되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티베트 문자를 정립하였는데, 이렇게 정립된 문자 체계를 통해 티베트 불교 전통이 확립될 수 있었다. | |||
Figure 6는 오늘날까지도 티베트 지역을 구분하는데 사용되는 전통적인 구분 방식을 보여준다: | |||
* 위창(Ü-Tsang): 티베트의 중심지로, 라싸(Lhasa)가 속한 지역이다. | |||
** 정치적·종교적 수도이자 티베트 불교의 핵심 지역으로,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자리한 곳이다. | |||
* 암도(Amdo): 티베트 동북부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칭하이성·간쑤성 일부에 해당한다. | |||
** 역사적으로 많은 학자와 고승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 |||
* 캄(Kham): 티베트 동남부 지역으로, 오늘날 쓰촨성과 윈난성 일부에 해당한다. | |||
** 강인한 전사 문화와 독특한 불교 전통으로 유명하다. | |||
한때 위구르, 아바스, 당나라마저 두렵게 만들 정도로 강성했던 토번 제국은 지나친 불교 우대 정책으로 그 쇠퇴기를 맞이한다. 특히 8세기 후반~9세기 초, 티베트 제국은 당나라의 서역 지역을 잠시 장악했지만, 점차 내분과 쇠퇴로 세력이 약해졌다. 848년, 장의조(張議潮, Zhang Yichao) 장군의 지휘하에 둔황의 한족 주민과 당의 세력이 협력하여 티베트군을 몰아내고 다시 한족 정권이 둔황(Dunhuang) 지역을 회복했다. | |||
===아바스 왕조=== | |||
아바스 왕조는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하여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까지 존속했던 강성한 이슬람 제국이다. 아바스 왕조는 학문·철학·의학·수학·천문학이 발달하였고, 고대 그리스·페르시아·인도 지식이 활발하게 번역·연구되었던 학문적으로 찬란했던 왕조이다. 또한 아바스 왕조는 중동에서 그치지 않고 중앙아시아로 그 세력을 넓히고자 하였다. | |||
중앙아시아에 대한 팽창을 멈추지 않고자 했던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는 중앙아시아 탈라스 지역에서 751년에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해당 전투 도중 당의 동맹 세력이었던 카를루크족이 배신하여 압바스 측으로 넘어갔고, 그 결과 당군은 대패하였다. 이후 당은 서역(중앙아시아) 지배력이 약해졌고, 실크로드의 서부는 아바스 세력이 장악하였다. | |||
==당의 쇠락== | |||
===안사의 난=== | |||
[[파일:Figure 7. 안녹사의 초상.png|섬네일|226x226픽셀|Figure 7. 안녹사의 초상]] | |||
[[파일:Figure 8. 현종의 피난.png|섬네일|250x250픽셀|Figure 8. 현종의 피난]] | |||
강성하였던 당나라는 현종(玄宗, Emperor Xuanzong)은 문화적 번영(개방, 예술, 외교)을 이끌었으나, 말년에 양귀비에 대한 지나친 총애와 반란 수습을 잘 못하여 당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킨 군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양귀비(楊貴妃, Yang Guifei)는 현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사치와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반란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군사적 원인이 있었으나, 후대에는 “현종의 방탕과 양귀비의 영향”이 반란의 상징처럼 묘사되었다.<br> 실제로는 절도사(節度使, Jiedushi) 제도가 문제의 원인이었다. 절도사는 국경 방어와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지방 군벌로, 점차 황제보다 더 큰 군사적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안녹산이라는 인물은 정치적인 압박에 벗어나고자 연나라 황제를 자칭하며 안녹산의 난을 일으켰다. 안녹산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여 한때 황제가 청두로 피난할 정도의 위세를 자랑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 |||
안녹산의 난은 당나라의 몰락을 결정지었다고 평가되는데, 우선 대규모 반란으로 인해 막대한 파괴와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백성 수에 맞춰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제도인 균전제가 안녹산의 난 이후, 전쟁과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귀족과 군벌이 토지를 독점하게 되어, 중앙의 통치 기반이 약화되었다. 또한 귀족(중앙) 권력 쇠퇴하고 대신 군벌(절도사)이 지역 권력을 장악하였다. 또한 실크로드에 대한 교역이 차단되어 국제 교류가 약화되고, 중앙아시아 지배권을 잃었다. 즉, 해당 사건을 통해 당나라는 마치 [[제자백가#시대적인 맥락|동주]]와 같은 허수아비 국가가 되었다. 또한 안녹산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직후에 사사명이라는 자가 또다시 사사명의 난을 일으켰는데, 흔히 안녹산의 난과 사사명의 난을 묶어서 안사의 난이라고 한다. | |||
===당나라 후기=== | |||
또한 안사의 난 이후 국가는 재정난에 빠져, 소금 전매제(Salt monopoly)를 부활시켰는데, 소금세는 곧 국가 재정의 최대 수입원이 되었다. 하지만 과중한 소금세는 농민과 상인들의 불만을 낳아 이후 또 다른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 |||
양쯔강 이남 지방의 울창한 정글과 숲이 개간이 되면서 남쪽이 새로운 농업 중심지로 부상하였는데, 이에 따라 북부(황하 유역) 지방의 인구가 감소하고, 남부(양쯔강·화남 지방) 지방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경제의 중심지는 점차 남중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 |||
==각주== | ==각주== | ||
2025년 9월 28일 (일) 05:53 기준 최신판
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당(唐)나라는 수나라의 뒤를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당나라의 건국

당나라는 이연(李淵)에 의해 618년에 건국되었으며, 그 해에 이연은 고조(高祖)로 즉위하였다. 당나라는 수도를 장안(長安, Chang’an)으로 삼았으며, 수나라의 대부분의 전통과 제도를 이어받았다. 동시에 더 오래된 한나라/주나라의 전통을 받아들여 새로운 전통 왕조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당나라의 초기 안정
당나라는 후기 수나라의 많은 반란과 군벌들 중의 하나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여러 군벌과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한 수나라의 제도를 계승하되, 지나친 강압 대신 실용적이고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또한 당 고조는 황제 자신을 "도덕적이고 하늘의 인정을 받은 통치자"로 강조하여 백성과 귀족의 지지를 끌었다. 이는 천명(天命) 사상과 연계된 것으로, 수나라의 과도한 전쟁과 토목 공사가 천명을 잃게 했다고 비판하였다. 반면 자신들은 덕치(德治, 도덕적 통치)로 천명을 회복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천명사상은 당나라의 법률인 당률에 잘 나타나 있다:
『공양전(公羊傳)』에 이르기를, “군주나 부모는 모반을 꾀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한다”라 하였다. 이는 곧 군주나 아버지를 해칠 반역의 마음을 품는 자가 있으면, 그들을 반드시 죽여야 함을 뜻한다. 『좌전(左傳)』에는 “하늘의 시기가 거꾸로 되면 재앙이 있고, 사람의 덕이 거꾸로 되면 난리가 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가장 존귀한 자리에 있으며 하늘의 귀한 명(命)을 받는다. 하늘과 땅처럼 백성을 덮어주고 떠받쳐 주므로, 곧 백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그 자식이자 신하들은 마땅히 충성과 효도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사악한 마음을 품고 반역의 뜻을 가지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하늘의 불변하는 이치에 거스르고 인륜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모반(謀反)이라 한다.
이는 왕은 천명을 받은 존재이므로, 반역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천지의 질서를 거스르는 죄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당률은 단순한 법이 아니라 도덕적·우주론적 질서를 반영한 규범 체계라는 것을 보여주며, 정치적 반역은 곧 우주의 조화를 깨뜨리는 중범죄로 규정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나라 사회
당나라의 수도, 장안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은 격자형(grid) 구조로 설계된 대규모 수도이다. 장안은 당나라의 상업, 문화, 외교가 집중되고 발전한 도시임은 물론 세계 도시적 성격을 지녔다. 이는 외국의 사신과 상인, 불교 승려들이 당나라와의 교류와 교역을 위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더욱 발전 시켜서 외부 세계와 중국 대륙과의 연결을 더욱 긴밀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였다.
당나라의 법과 제도
당률(唐律, Tang Legal Code)는 법가(法家)의 엄격한 법을 적용함은 물론, 유교적인 도덕 규범을 결합하였다. 이를 통해서 단순히 처벌이 아니라 윤리적 교화를 함께 강조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전체(한국, 일본, 베트남)의 법체계 모델이 되었으며, 법과 도덕의 균형이라는 전통을 확립하였다.
당은 수나라의 제도와 성과를 계승하고자 했다. 수의 관료제, 법전, 균전제를 계승한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무리한 대규모 토목사업, 과중한 세금, 무리한 대외 원정은 피하며, 성공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당나라의 종교

당나라는 도교, 불교, 유교를 모두 받아들여, 다양한 종교/사상이 공존하였다:
- 도교(道敎, Daoism): 도가에서 발전한 민간 사상이다. 황제를 도교적 이상과 연결하여 정통성과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 불교(佛敎, Buddhism): 불교는 국가의 지원 아래 크게 번성하였으며, 대규모 불교 사찰과 불상이 건립되었다. 또한 불교는 특유의 보편적인 원리와 세계관을 통해서 우주론과 보편적 권위를 제공하는데 사용되었다.
- 유교(儒敎, Confucian): 유교는 여전히 교육과 정치의 기본 틀로 여전히 존속하였으며, 인재 등용에 반영되었다. 이는 유교가 강조하는 도덕적인 정치와 충효에 기반한 것이다.
이는 유불선이 동시에 공존한 당나라의 포용성과 문화적인 풍요를 보여주며, 당나라가 유불선의 요소를 동시에 활용하여 통치이념을 구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 개혁
중국 역사에서 토지 분배는 국가의 안정과 직결되었다. 이는 귀족이나 대지주가 토지를 독점하면, 농민들은 경작지를 잃고 유민(流民)이 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나라는 백성들이 최소한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당나라는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제도인 균전제(均田制, Equal-field system)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농민의 안정은 물론 귀족의 토지 독점을 완화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함께 거둘 수 있었다. 이는 당나라의 재정과 군사 제도의 기초 역할을 했다. 특히, 균전제는 부병제(府兵制)와 연결되어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해야 했고, 이는 당의 군사력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문화적 개방
장안(長安)은 당나라의 수도이자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장안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페르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심지어 비잔틴 제국과도 연결되어 다양한 사상과 예술이 유입되었다. 예를 들어 불교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승려들에 의해 번역되고 확산되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교, 기독교도 장안에 전해져 사원과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당나라의 팽창

당나라는 초기 정복 전쟁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한반도 일부, 베트남 북부까지 영향력 확대하였음은 물론,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발전시켜서 경제적 이익과 문화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팽창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당나라를 "강대국"으로 인정받게 하였으며, 일본과 신라는 물론 서역의 국가들까지 당나라에 사절을 보내었다. Figure 3는 당나라의 도호부(都護府, Protectorates) 지도이다. 도호부란 변방(특히 서역과 북방)을 통치·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행정 기관으로, 총독부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이는 당나라가 중원에서 거리가 먼 서원과 북방에도 그 영향력이 거대했음을 보여준다.
당나라의 군사 조직
당나라는 초기에 부병제(府兵制, Fubing system)를 실행하였는데, 이는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군사 복무를 병행시키는 제도이다. 이는 군사와 농업을 균형있게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규군(professional armies)으로 대체되었다.
대외 관계
수·당은 북방 유목민과 활발히 접촉했는데, 이는 당나라에게 중앙아시아는 중요한 교역로이자 군사적 충돌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민과의 평화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쟁·동맹·혼인관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는데, 때로는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대치했고, 때로는 정권 안정을 위해 공주를 혼인 보내거나(화친정책), 선물과 조공을 교환했다. 이때 유목민들은 말을 비롯한 군사력과 교역품을 제공했고, 당나라는 비단, 곡식, 금속제 무기 등을 제공하면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또한 당나라는 조공(朝貢, tribute)체제를 발전시켰다. 조공체제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상징하는 제도로, 주변 국가나 부족들이 사절을 보내 “조공”을 바치면, 황제는 “은혜로운 하사품”을 돌려주는 방식이다. 당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동아시아 외교의 표준으로 삼았다. 이는 단순한 외교가 아니라, 당이 세계 질서의 중심임을 과시하는 이념적 장치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역의 성격이 강했으며, 조공품보다 돌려주는 하사품이 훨씬 귀한 경우가 많아 주변국들이 경제적 이득을 얻는 수단이기도 했다.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 교역로가 지나가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당은 서돌궐, 티베트 제국, 아랍 세력 등과 충돌하면서 군사·외교 경쟁을 벌였다.
당나라의 패권 경쟁

당나라는 실크로드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으며, 실크로드의 안정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서역(중앙아시아)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는 다른 제국들과의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Figure 4는 8세기 경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패권 경쟁("Great Game")을 하던 제국들을 보여준다:
- 아바스 왕조(Abbasids): 아바스 왕조는 중동 지방에서 팽창하던 강성한 이슬람 제국이다.
- 토번 제국(Tibetans): 토번 제국은 오늘날의 티베트 지방에서 성장하여 당과 충돌한 제국이다.
- 튀르크 세력(Turks): 튀르크 세력은 유목 제국으로, 북방 지역을 장악하였다.
- 당 제국: 실크로드 동부와 중국 내 중심부 장악하였다.
이들은 모두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기 위해서 시도하였으며, 이는 결국 당나라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토번 제국


토번 제국은 송찬간포(松贊干布, Songtsen)에 의해서 건국되어 중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송찬감포는 중국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와 혼인하여 당과의 외교적, 문화적 교류를 강화했으며, 불교를 티베트에 본격적으로 들여왔다. 이때 톤미 산보타(Thonmi Sam Bhota)는 인도에 파견되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티베트 문자를 정립하였는데, 이렇게 정립된 문자 체계를 통해 티베트 불교 전통이 확립될 수 있었다.
Figure 6는 오늘날까지도 티베트 지역을 구분하는데 사용되는 전통적인 구분 방식을 보여준다:
- 위창(Ü-Tsang): 티베트의 중심지로, 라싸(Lhasa)가 속한 지역이다.
- 정치적·종교적 수도이자 티베트 불교의 핵심 지역으로,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자리한 곳이다.
- 암도(Amdo): 티베트 동북부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칭하이성·간쑤성 일부에 해당한다.
- 역사적으로 많은 학자와 고승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 캄(Kham): 티베트 동남부 지역으로, 오늘날 쓰촨성과 윈난성 일부에 해당한다.
- 강인한 전사 문화와 독특한 불교 전통으로 유명하다.
한때 위구르, 아바스, 당나라마저 두렵게 만들 정도로 강성했던 토번 제국은 지나친 불교 우대 정책으로 그 쇠퇴기를 맞이한다. 특히 8세기 후반~9세기 초, 티베트 제국은 당나라의 서역 지역을 잠시 장악했지만, 점차 내분과 쇠퇴로 세력이 약해졌다. 848년, 장의조(張議潮, Zhang Yichao) 장군의 지휘하에 둔황의 한족 주민과 당의 세력이 협력하여 티베트군을 몰아내고 다시 한족 정권이 둔황(Dunhuang) 지역을 회복했다.
아바스 왕조
아바스 왕조는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하여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까지 존속했던 강성한 이슬람 제국이다. 아바스 왕조는 학문·철학·의학·수학·천문학이 발달하였고, 고대 그리스·페르시아·인도 지식이 활발하게 번역·연구되었던 학문적으로 찬란했던 왕조이다. 또한 아바스 왕조는 중동에서 그치지 않고 중앙아시아로 그 세력을 넓히고자 하였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팽창을 멈추지 않고자 했던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는 중앙아시아 탈라스 지역에서 751년에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해당 전투 도중 당의 동맹 세력이었던 카를루크족이 배신하여 압바스 측으로 넘어갔고, 그 결과 당군은 대패하였다. 이후 당은 서역(중앙아시아) 지배력이 약해졌고, 실크로드의 서부는 아바스 세력이 장악하였다.
당의 쇠락
안사의 난


강성하였던 당나라는 현종(玄宗, Emperor Xuanzong)은 문화적 번영(개방, 예술, 외교)을 이끌었으나, 말년에 양귀비에 대한 지나친 총애와 반란 수습을 잘 못하여 당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킨 군주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양귀비(楊貴妃, Yang Guifei)는 현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사치와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반란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군사적 원인이 있었으나, 후대에는 “현종의 방탕과 양귀비의 영향”이 반란의 상징처럼 묘사되었다.
실제로는 절도사(節度使, Jiedushi) 제도가 문제의 원인이었다. 절도사는 국경 방어와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지방 군벌로, 점차 황제보다 더 큰 군사적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안녹산이라는 인물은 정치적인 압박에 벗어나고자 연나라 황제를 자칭하며 안녹산의 난을 일으켰다. 안녹산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여 한때 황제가 청두로 피난할 정도의 위세를 자랑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안녹산의 난은 당나라의 몰락을 결정지었다고 평가되는데, 우선 대규모 반란으로 인해 막대한 파괴와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백성 수에 맞춰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제도인 균전제가 안녹산의 난 이후, 전쟁과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귀족과 군벌이 토지를 독점하게 되어, 중앙의 통치 기반이 약화되었다. 또한 귀족(중앙) 권력 쇠퇴하고 대신 군벌(절도사)이 지역 권력을 장악하였다. 또한 실크로드에 대한 교역이 차단되어 국제 교류가 약화되고, 중앙아시아 지배권을 잃었다. 즉, 해당 사건을 통해 당나라는 마치 동주와 같은 허수아비 국가가 되었다. 또한 안녹산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직후에 사사명이라는 자가 또다시 사사명의 난을 일으켰는데, 흔히 안녹산의 난과 사사명의 난을 묶어서 안사의 난이라고 한다.
당나라 후기
또한 안사의 난 이후 국가는 재정난에 빠져, 소금 전매제(Salt monopoly)를 부활시켰는데, 소금세는 곧 국가 재정의 최대 수입원이 되었다. 하지만 과중한 소금세는 농민과 상인들의 불만을 낳아 이후 또 다른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양쯔강 이남 지방의 울창한 정글과 숲이 개간이 되면서 남쪽이 새로운 농업 중심지로 부상하였는데, 이에 따라 북부(황하 유역) 지방의 인구가 감소하고, 남부(양쯔강·화남 지방) 지방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경제의 중심지는 점차 남중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