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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교양 문서]] [[분류:중국 문화와 역사]] 상위 문서: [[중국 문화와 역사#명청시대(明淸時代)|중국 문화와 역사]] ==개요== 해당 문서에서는 명(明, Ming)나라가 어떻게 형성되고,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한다. ==역사== 원나라가 멸망할 당시 사회는 전세계적인 격동의 시기였다. 이는 흑사병 때문이었는데, 몽골의 광대한 교역 체계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유럽 인구의 3분의 1 ~ 2분의 1이 사망했다. 이를 통해 농업·도시·상업 시스템이 붕괴하였으며,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봉건 질서가 붕괴되었다. 이는 임금 상승과 사회 이동이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근대적 사회 구조가 유럽 전역에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는 흑사병의 발원지였기 때문에 서유럽만큼 종말론적인 충격을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흑사병은 중국의 많은 인구를 사망시키고, 교역로를 붕괴시켜 원나라를 멸망을 몰아넣은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건국과 발전=== 흑사병과 여러 대내외적인 문제가 겹친 [[원나라|원(元)나라]]는 붕괴하고, 1368년에 명(明)나라가 건국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인물은 주원장(朱元璋, Zhu Yuanzhang)인데, 그는 농민 출신으로 홍건적 반란을 통해 원을 멸망시키고 명 왕조를 창건하였다. 그는 제위에 올라 홍무제(洪武帝, Hongwu Emperor)가 되었으며, 원나라 멸망 후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질서 회복(reconstruction)을 시도했다. 특히 홍무제는 왕권 강화에 집중하였다. 명나라 초기의 수상인 호유용(胡惟庸, Hu Weiyong)은 주원장의 신임을 받았으나 나중에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해당 사건 이후 주원 장은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홍무제 사후 홍무제의 건문제가 즉위하였다. 하지만 건문제로부터 정치적인 견제와 압박을 받던 홍무제의 넷째 아들 주체(朱棣, Zhu Di)는 정난의 변(靖難之役, Jingnan Campaign)을 일으켰다. 정난의 변을 통해 황제가 된 그는 영락제(永樂帝, Yongle Emperor)가 되었고, 명대의 전성기를 열고 북경 천도, 자금성 건설, 정화의 원정 등을 추진하였다. ==사회== ===유교의 부흥=== 홍무제는 원나라의 불교·다문화적 질서에서 벗어나, 전통적 유교 이념을 복원하여 사회를 재편하고자 하였다. 성논육언(聖論六言, Sacred Edict of Six Maxims)은 명대 통치 이념의 핵심이었던 유교적 도덕 교화 정책으로, 아래와 같다: # 효순부모(孝順父母)<ref>Filial Piety to the Parents</ref>: 부모에게 효도하라 # 공경장상(恭敬長上)<ref>Respect for Senior</ref>: 어른과 윗사람을 공경하라 # 화목향리(和睦鄉里)<ref>Concord Among Neighbors</ref>: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라 # 교훈자손(教訓子孫)<ref>Instruction of Youth</ref>: 자손을 바르게 교육하라 # 각안생리(各案生理)<ref>Attending to One’s Proper Employment</ref>: 자기 생업에 충실하라 # 무작비위(無作非為)<ref>Prevention of Evil Deeds</ref>: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제도=== 명나라는 사회 안정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제도들을 시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과거제(Civil Service Examination System)는 유교에 대한 성취를 바탕으로 하는 능력 기반의 관료 선발 시스템이다. 이는 명나라가 유학에 기초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것을 돕는 것은 물론, 능력 위주의 인재를 바탕으로 귀족 세력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는 리갑제(里甲, Lijia)를 실행하였다. 리(里)란 행정·세금 징수 단위로, 1리는 110호에 해당한다. 이때 110개의 호들 중에서 부유한 10개의 호들을 선발하여 각각 10개의 호들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이는 효율적으로 지방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세계제국으로서의 명나라=== 명나라는 비록 유학에 근거하여 통치를 하였지만, 여전히 다언어적·다민족 제국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는 사이관(四夷館, Siyiguan)과 회동관(會同館, Huitongguan)이다. 사이관은 원대(몽골 제국)의 중앙정부 조직을 계승한 번역기관으로, 주변 국가·소수민족의 언어를 중국어로, 중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부서이다. 이때 “四夷”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의 이민족을 뜻하며, 즉 명이 여전히 제국적 외교체제를 유지했음을 의미한다.<br> 또한 회동관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통역을 담당한 기관. 명은 스스로 중화의 중심이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수십 개의 조공국과 교류하는 다언어 체제를 유지했다. 이들은 명나라가 중화 왕조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다문화적 세계제국의 연속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명나라에서의 불교=== Figure 는 티페트 불교의 제 5대 까르마파(Karmapa)인 대보법왕(大寶法王, Dabao fawang)가 영락자에게 불교적인 입문식(灌頂, initiation)을 주는 장면이다. 이는 영락제는 스스로를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로 자처하며, 원나라 황제들이 사용했던 불교적 제국 이념을 계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몽골 제국이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제왕(護法王)’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했던 전통이 명에도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Figure 는 위 사건을 시각적으로 기념한 거대한 불교 문서이다. 이는 약 5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대보법왕의 북경 방문과 영락제와의 만남을 기록한 것이다. 그림 왼쪽에는 구름과 하늘, 불교 사원이 묘사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여러 언어로 된 기록이 병기되어 있다. 이는 명 제국의 다문화적 외교 네트워크를 상징하며, 내정에서는 유교적 통치로 복귀했지만, 외교·종교 차원에서는 여전히 몽골 제국 시기의 ‘세계제국적 포용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화의 원정== ===정화=== 정화(鄭和, Zheng He)는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아 1405–1433년 사이 7차례에 걸쳐 인도양을 항해한 대항해가이다. 그는 운남성(雲南省) 출신의 후이족(Hui People)이었으며, 무슬림이었다. 그는 어릴 때 명나라 건국 과정에서 명군에게 포로로 잡혀 환관이 된 뒤 영락제의 신임을 받아 거대한 해상 원정을 이끌었다. ===정화의 원정=== Figure 는 정화의 7번에 걸친 항해 경로를 보여준다. 그는 난징(南京, Nanjing)이나 쑤저우(苏州, Suzhou)시에서 출발하여 인도네시아, 인도, 페르시아, 동아프리카 등에 대한 항해를 하였다. 이때 그의 항해의 목적은 황제의 위엄을 알리고, 조공 관계를 재확인하는 외교적인 목적이었다. 또한 해상 실크로드”를 재개하여 중국과 이슬람권, 아프리카를 연결하고, 향신료, 보석, 말, 동물(기린 등)을 교환하고자 하였다. 정화의 항해는 세계사적으로 전례를 찾기 힘든 규모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항해는 당시 기록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는 당시 기록과 현대 학계의 추정치를 비교한 표이다. {| class="wikitable" |+ !항목 !공식 기록(18세기 문헌) !실제 추정치 |- |선박 길이 |450ft (약 137m) |200ft (약 60m) |- |너비 |180ft (약 55m) |60ft (약 18m) |- |돛대 수 |9개 |3–4개 |- |선원 수 |수천 명 |약 200–300명 |} 전통적 중국 사료(특히 18세기 청대 기록)는 정화의 배를 “세계 최대 목선”으로 묘사했으나, 고고학적으로는 그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중론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도 여전히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선박이었고, 국제 항해를 수행할 수 있는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준다. ===정화의 원정의 의의=== 정화의 원정은 영락제의 정치적인 프로젝트로 해석된다. 영락제는 정변을 통해 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국에 조공(tribute) 관계를 요구하여 “중화(中華)의 중심성”과 황제의 보편적 권위를 드러내었다. 이때 조공 관계는 각국 사신이 중국으로 와서 공물을 바치고, 중국은 더 값비싼 선물을 주며 “황은(皇恩)”을 보여주는 형식이었죠. 각국 사신이 중국으로 와서 공물을 바치고, 중국은 더 값비싼 선물을 주는 형식이었다. 따라서 이는 군사적인 정복이나 상업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외교적인 위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화의 원정은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이는 정화 사후, 명나라 정부가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시행하여 대외항해를 중단하고 자급자족적 체제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이는 명나라가 주도하던 해양 교류가 일회성으로 종료되는 결과를 낳는다. 현대에 정화의 원정은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화는 일체의 식민지 개척이나 점령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유럽의 대항해시대에서 시작된 식민지 개척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중국 정부는 당시 조공 관계에 특수성을 기반으로 정화의 원정을 “중화 평화 외교의 기원”,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역사적 전례로 강조한다. ==경제== ===조세 제도=== 명나라 초기에는 국가의 세금 징수량과 세율이 모두 크게 증가했다. 아래는 원대와 명나라 초기의 국고 수입과 추정 세율을 비교한 표이다: {| class="wikitable" |+ !시기 !국고 수입(곡물) !추정 세율 |- |원대 약 1330년 |11.5억 리터 곡물 |3.4% |- |명대 1393년 |31억 리터 곡물 |9.1% |} 원나라는 세율이 낮고 느슨한 징수 체계를 운영하였으나, 명나라는 훨씬 집중적이고 관료적인 조세 체제를 구축했다. 명나라 초기는 곡물을 기반으로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이를 위해 리갑제가 실행되었다. 중앙 관료제가 직접 농민을 관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리갑’이라는 공동체 단위를 통해 세금과 부역을 집단적으로 징수한 것이다. 하지만 곡물을 기반으로 하는 세금 중심 체제는 상업화가 진전되자 비효율적으로 변했고, 결국 은 중심의 화폐 경제로 전환될 기반이 되었다. ===대운하=== 수나라 시기에 세워진 대운하는 명나라 때에도 활발히 사용되고 확장되었다. 남쪽 양쯔강 유역(특히 강남, 소주·항주 등)은 곡물과 상공업의 중심이었고, 북쪽 수도 베이징으로 세곡(稅穀)을 운송했다. 즉, 대운하는 단순한 수송로가 아니라, 국가 재정과 상업의 연결선이었으며, 북경(수도)과 남쪽의 양쯔강 유역(농업 및 상업 중심지)을 잇는 국가 경제의 대동맥이었다. ===은의 역할=== 명나라 시기에는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곡물을 기반으로 하는 세금 제도인 리갑제는 점점 비효율적으로 되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는 곡물 대신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는 곡물등의 여러 세목을 은으로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일조편법(一條鞭法, Single Whip Reform) 이라고 불린다. Figure 는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채굴한 은으로 만든 동전이다. 명나라 시기에 유럽 제국들은 신대륙에서 대량의 은을 채굴하여 아시아와 무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량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특히 명나라 조세 제도의 근간은 은이었기 때문에, 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은은 세계 무역의 보편 화폐로 기능하게 되었다. ===은 기반 세계 경제의 중심=== Figure 는 1571년 이후 형성된 세계 최초의 지속적 글로벌 무역 루트를 보여준다. 이는 신대륙으로부터 은을 채굴한 서양과 비단, 도자기, 차 등을 생산하는 중국 사이의 무역 루트이다. 이를 통해서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가 하나의 경제 시스템으로 연결되었다. 이를 통해 명 후기 중국은 정화의 항해 이후 다시 한 번 세계 무역의 중심 에 복귀할 수 있었으며, 은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의 일부이자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광대한 교역을 통해 중국의 문화는 서양에도 전해졌는데, 케첩이나 츄러스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 이러한 흐름은 명나라의 도시화, 상인 계층의 성장, 사치 산업(비단, 도자기, 가구 등)의 번성을 이끌었다. 또한 이를 통해 소비 중심의 물질 문화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도덕적 불안”을 낳았으며, “과시적 사치가 도덕적 품격과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하였다. 명나라의 소설 금병매(金瓶梅, Jin Ping Mei)는 경제적인 풍요에 대한 명나라 사람들의 시각을 보여준다. 해당 소설은 곡물보다 은, 생산보다 소비가 중심이 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해당 맥락에서 주인공 서문경(Ximen Qing)은 부유한 상인이자 관료로, 그의 사치와 성적 타락은 은 경제가 낳은 물질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특히 문진형(文震亨, Wen Zhenheng)은 명나라 말기 강남 지역의 엘리트이자 문인으로, 상업화된 사회에서 “품격 있는 삶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의 저서 장물지(長物志, Treatise on Superfluous Things)는 약 1620년대에 집필되었으며,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가구, 정원, 그림, 향, 도자기, 의복 등의 일상 물건들을 어떻게 "우아하게" 사용하는 지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는 단순한 사치 용품에 대한 가이드가 아니라, 과도함을 경계하고, 자연스러움과 절제를 미덕으로 보는 도덕적 미학서로서의 기능을 하였다.<br> 그는 ‘품격(雅, ya)’과 ‘속됨(俗, su)’를 구분하였고, 진정한 교양인은 품격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를 위해 자연스러움·절제·조화를 강조하였으며, 은 경제를 통해 대두된 지나친 사치 풍조를 비판하였다. 또한 이에 대해 “지나침은 하늘을 거스르고, 자연스러움은 도(道)에 합한다.”라고 하여 유교적/도교적인 근거를 활용하였다. 즉, 문진형은 "사치와 번영이 인간을 타락시키는가, 아니면 사회를 세련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쾌락을 절제와 조화로 다스리면 그것이 미덕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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